[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② 양들의 침묵과 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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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② 양들의 침묵과 바흐
  • 오한샘 EBS PD
  • 승인 2007.10.05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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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이 글을 연재한 이후로 실로 오랜만에 필자는 바흐와 그의 음악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일찍이 말했듯이 바흐의 음악은 영화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단 몇 장면에 개입하고서도 영화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규정 지워주는 결정적 역할의 조미료 값을 톡톡히 해낸다.
 
 그의 음악은 영화의 주요장면에 으레 깔리곤 하는 일반 배경 음악들과는 달리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마치 대지에 물이 스며들 듯이 자연스레 다가갈 뿐이어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대가를 대가답게 하는 게 아닐까?

그의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단순히 분위기를 만들어 내려는 기능적 영화 장치로서가 아닌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한계, 원죄의 모순성을 한마디 언어의 도움 없이 조용히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제시하고 있는 넓디넓은 사유의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또한 얼마나 영화적인가! 그렇다면 ‘양들의 침묵’이란 영화 속에 바흐는 어떻게 숨어 있을까? FBI의 견습 수사관(조디 포스터)과 희대의 살인마 렉터 박사(안소니 홉킨스)와의 두뇌 게임을 통해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이 스릴러물 역시, 앞의 영화 ‘세븐’에서처럼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에 가장 순수하고 여린 바흐의 선율이 쓰이고 있다.
 
 얼마나 여린지 이 곡이 작곡된 시절. 곡의 의뢰자는 잠 안 오는 밤, 수면용으로 이 작품을 활용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음악은 태교음악으로도 쓰일 정도로 따뜻함과 순수함이 물씬 배어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는 중후함이 이 곡 역시 한 꺼풀의 베일 속에 싸여 감추어져 있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렉터 박사 역시 인간심리에 관한 대가로 나온다.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흔히들 어둡게만 비쳐졌던 종래의 영화 속 살인자의 이미지를 일순간에 뒤엎는다.
 
 차갑고 냉철한 지적 판단력의 소유자이자 인간 감정에 대한 깊이 있는 안목을 갖춘 의학박사 렉터의 등장은 엘리트 출신의 살인자라는 측면에서 영화에 묘한 매력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 캐릭터를 통해서 바흐의 숨겨진 매력은 또 한 번 빛을 발하게 된다.

 여러분은 혹시, 렉터 박사가 특수감금시설에 이송되기 위해 시내 한 건물 안 임시 철장 속에 수감되어 있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그는 자신에게 식사를 전달하려고 철장 안으로 다가오는 경찰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붉은 선홍빛 핏줄기가 확연히 드러나는 가운데 렉터 박사가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음악에 몰입하는 장면을 잠시 떠올려보시기 바란다. 대단위 교향곡이나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의 합창곡이 아닌 천진난만하다고까지 할 정도로 순수한 선율의 골드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이 화면의 한 귀퉁이에서 조그맣게 울려 퍼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여리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한, 크지 않은 선율에 몸을 맡긴 희대의 살인마가 서서히 그 감정을 다스려나가는 모습은 무섭다 못해 전율을 느끼게까지 한다.
 
 바흐의 다양한 음악 속에 내재된 원칙은, 인간으로 치자면 다양한 감정들과 사고들을 지배하는 이성에 비교될 수 있다. 렉터 역시 살인행위에 의해 한껏 흥분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돌아오는 자신을 바흐의 음악 속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그의 얼굴은 너무나도 천진난만하여 자칫 그곳이 살해 현장이라는 사실을 잊게까지 한다. 그는 흥분된 감정을 가라앉히는 방도로 바흐의 음악을 택한 것이다. 너무나도 탁월하게 감정을 통제하는 방법을 터득한 살인자의 등장! 이즈음 되면 필자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된다. 한숨만이 나올 뿐이다. 

 인간 존재에 대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이해와 사상을 담고 있는 바흐의 작품들! 그의 한 음 한 음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 속에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드라마틱한 무엇이 아무렇지도 않게 숨어 있었다.
 


오한샘  / EBS 교양문화팀 PD 


1991년 입사해 <예술의 광장> <시네마천국> 등 문화, 공연 예술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  <장학퀴즈> <코라아 코리아> 등이 있다. 영화, 음악 그리고 미술 등에 조예가 깊으며 현재 연재하고 있는 영화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미술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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