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⑧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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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⑧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 오한샘 EBS PD
  • 승인 2007.10.05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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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란 화가의 작품을 다룬 영화 한편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그간 영화는 종종 화가의 작품들에서 그 형태와 아이디어를 차용해 왔다.

이 점은 굳이 하나하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나 로만 폴란스키, 그리고 가까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같은 거장들의 작품에서도 손쉽게 찾 아볼 수 있다. 어쩌면 수많은 스태프와 장비, 그리고 이야기꾼들의 조합을 통해 탄생되어지는 이른바 동영상들의 집합체인 영화보다도 오히려 말없는 한 장의 그림이 더 많은 것을 전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이른바 명인(名人)이라 일컬어지는 많은 감독들이 아직도 한 폭의 그림에 매혹당해 ‘오마주’라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작품 속에서 슬금슬금 차용 아닌 차용을 해대고 있는 걸 보면, 걸작의 요소는 반드시 제작될 당시의 조건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여기 한편의 작품을 온전히 화가의 작업과정에 집중하여 풀어낸 이야기가 있다. 바로 ‘북구의 모나리자’라고 일컬어지는 베르메르의 걸작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소재로 한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동명 소설이다.

그리고 다시 소설 속의 평면적 언어에 빛과 색을 불어넣어 스크린으로 이끌어낸 피터 웨버 감독의 영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2003)가 바로 그것이다. 한 연장선상에 있는 세 가지 고리들! 도대체 한 장의 그림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삼백여년도 훨씬 지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야단들일까? 알듯 말듯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비스듬히 비껴선 형태로 응시하고 있는 10대 소녀의 모습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을 이토록 설레이게 하는 것일까?
 
이 한 장의 그림이 갖고 있는 잠재력은 현상 자체만 놓고 보면 언뜻 이해가 잘 안 갈지도 모른다.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야기 소재로 쓰이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눈앞에서 그 모습을 직접 확인해 보겠다고 머나먼 유럽의 박물관까지 날아가, 긴 줄 맨 끝에 서서 탄성을 쏟아내는 남녀노소 세계 각국의 인종들을 보면서 필자는 합리적 잣대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인간 속성의 그 무엇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화가 베르메르는 흔히 일상의 삶속에 숨어있는 빛의 미묘한 움직임들을 발견해낸 화가라고들 한다. 베르메르 이전의 경우 화폭의 소재는 주로 전쟁이나 역사의 한 장면, 또는 성서적 영웅이나 국가의 지배 권력을 상징하는 서사적 접근으로 이루어졌다면, 베르메르가 이루어낸 소재의 변화는 엄청난 것이었다.

마치 전쟁터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며 위세를 과시하는 장군의 무공보다 홀로 서가에 파묻혀 적진의 전략을 분석하는 책사의 내공이 더 위협적이듯이 베르메르의 존재는 빈 화선지에 한 획을 가르는, 소리 없는 혁명과도 같다. 적어도 필자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서민들의 일상사속에 녹아 들어있는 빛의 반짝이는 영롱함 앞에서 우리는 또다시 신분의 귀천을 뛰어넘는 개개 인간사의 소중함과 고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조용함 속에 빛을 발하는 거장의 숨결과 그리트라는 이름의 철모르는 10대 하층민 출신의 소녀가 오늘날 더도 없이 비싼 그림 속의 고귀한 모델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이 작품 속에서 즐길 수 있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2시간 남짓의 스크린 속에는 예술에 눈을 떠가는 인간존재의 경이로움과 함께 화가 베르메르가 표현해 내려했던 빛의 질감들이 담겨져 있다. 창문을 통해 투과된 빛이 여인의 얼굴- 눈과 코 그리고 턱 선-에 부딪쳐 만들어낸 굴곡의 명암 속에서 필자는 흡사 박물관에 와있는 듯한 가슴절임을 느낀다.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에 배인 관능미….

이 영화  속 적막들은 차라리 잘 배치된 음악보다도 더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할리우드의 화려한 액션과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놓치시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왕이면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그림 한 점을, 조용히 혼자서 음미해 보길 바란다. 누가 아는가? 소녀의 목소리가 들릴지? 
 

오한샘  / EBS 교양문화팀 PD 

1991년 입사해 <예술의 광장> <시네마천국> 등 문화, 공연 예술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  <장학퀴즈> <코라아 코리아> 등이 있다. 영화, 음악 그리고 미술 등에 조예가 깊으며 현재 연재하고 있는 영화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미술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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