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⑮ 음주가무(飮酒歌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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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가무(飮酒歌舞)란 말이 있다. 굳이 자세히 언급을 안 해도 이 말이 우리 민족의 한 특성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한반도라는 특수한 지리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가면서까지 지켜온 단일민족의 혈통 속에 흐르는 특성이 음주가무라니, 조금은 이상하기도 하다.

21세기가 도래한 이후, 기존 서방 중심의 문명에서 점차 아시아로 무게중심의 축이 옮겨지고 있는 이 마당에, 왠지 맘에 내키지 않는 표현이다. 하루라도 경쟁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에 시간을 쪼개어 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하는 이 와중에 음주가무라는 단어가 아직도 종종 주변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이 말의 기본 의미를 잘 모르기 전까지는 그랬다. 우연히 주변 이웃나라들의 공연을 보면 경탄해마지 않을 때가 있다. 중국의 경극(京劇)이나 일본의 가부키(歌舞伎)를 보더라도 그 섬세함과 유려함에 눈길이 쉽게 가게 된다. 특히 가부키의 경우, 형식 속에서 우러나오는 정확한 문법과 동작하나하나에 곁들여진 세심함이 일본전통의 특성과 어우러져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해줬다.

접시 하나 하나에 정성들여 놓여진 정갈한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초대받은 느낌! 어느 하나 흐트러짐 없는 순서와 배치에 먹기 전부터 눈이 배불러지는 시각적 형식미에 제법 부러움마저 가졌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처럼 정교히 계산되고 꾸며진 공연 형태 앞에서, 아무 기준 없이 마구 마구 속에 있는 감정을 뿜어내는 듯한 우리의 전통연희가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공연 관람 후 극장 앞 선술집에 홀로 앉아, 역시 선진국이 다르긴 해도 뭔가 다르구나하는 푸념 속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 우연히 음주가무라는 말이 다시금 생각이 났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그 기원이 모호할 정도로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이 말이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고서나 한자성어 속에 사장되지 않고 현재까지 생활 속에서 살아있는 언어가 된 연유가 있지 않을까?

문득 연극인 오태석의 말이 떠올랐다. “처음 일본의 전통공연을 접했을 때 매우 놀랐습니다. 일본인들은 이 같은 형식을 만들어서 조금만 응용해도 아름답고, 작은 동작마저도 다 언어가 되고 의미를 갖는 틀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대체 뭘 했나, 뭘 하고 있었길래 이런 것 하나 못 만들었던가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헌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일본사람들은 틀을 만들어주면 그 안에서만 합니다. 절대로 나오려 하지 않는 습성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당초에 틀을 거부합니다. 틀을 거부할 뿐만이 아니라 애당초 틀 속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틀 안에 집어넣기에는 너무나도 자유스러우니까, 힘이 넘치니까...”

두 눈에 힘이 번쩍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하기사 음주가무(飮酒歌舞)하는데 무슨 틀이 있을까?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우리선조들의 연희정신이, 그 자유스러운 영혼들이 느껴지는 듯 했다. 순간 목이 탁 메었다. 멍석하나 깔아놓고 시공간을 훌쩍 훌쩍 넘어버리는 우리네 할아버님들의 당당하다 못해 기발한? 무대정신은 이미 수세기전에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금의 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한류의 원천이 바로 선조들의 이런 놀이문화에 있었을 줄이야!
몇 평 안 되는 공간위에서 임금의 폭정을 꾸짖고 조상을 불러내고 사랑을 노래했던, 틀에 가둘 수 없던 그 영혼들이 이제 우리들 앞에 펼쳐져있다. 멍석위에 흐드러지게 놀던 그 놀이패의 정신들이 수많은 공연장의 무대 위에서 서서히 아시아를 향해, 세계를 향해 기지개를 펴고 있다. 이 봄!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광대들의 현란한 교향악에 참여해보는 건 어떨까? 적어도 음주가무(飮酒歌舞)민족의  후손들이라면 말이다. 
 

오한샘  / EBS 교양문화팀 PD 


1991년 입사해 <예술의 광장> <시네마천국> 등 문화, 공연 예술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  <장학퀴즈> <코라아 코리아> 등이 있다. 영화, 음악 그리고 미술 등에 조예가 깊으며 현재 연재하고 있는 영화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미술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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