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⑰ 돈 까밀로와 뻬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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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 다양한 경험에 길들여지면서도 때때로 삶의 이면들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이미지 시대가 도래한 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무차별적인 시각적, 청각적 자극들은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현혹시키며 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어렵게까지 하는 듯  싶다.

보다 더 빠르게, 보다 더 신속하게, 그리고 항상 새로워야만 하는 디지털 이미지 시대를 맞아 사회적 시스템 역시 그러한 특성을 띄어야만 제 기능을 하는 것처럼 인정받는 현실이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인간이 지닌 근본적 장점은 빠른 일처리나 생산력의 속도보다는 사고(思考)의 깊이에 있을 지언데. 마치 기계와 경쟁하려는 듯한 현 시대의 속도중시 풍조를 보면 필자 같은 아날로그 형 인간은 조만간 쓸모없는 구성원으로 전락하고 말 것만 같은 공포감마저 든다.
 
그런데 오히려 이를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과 지혜를 책 속에서 찾자고 주장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제안일까? 자판을 두들기면 몇 초도 되지 않아 답이 나오는 검색엔진이나 정보체계가 아닌 책갈피사이에 채워진 활자들을 한줄, 한줄 읽어나가며 삶의 진리를 탐구해 나간다면 일상 속 속도위주의 생활로 놓쳐왔던 많은 것들을 건져낼 수 있지 않을까? 수십년, 수백년의 시대를 넘어서서 인간심성의 다양한 기저들을 자신만의 통찰력을 통해 잔잔히 꿰뚫어 낸 선인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 접해도 색다른 감흥을 준다. 이른바 클래식이라고 하는 것의 잠재력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멀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 가깝게는 20세기의 소설가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재치와 지혜가 때로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필자에게 커다란 깨달음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얼마 전 이탈리아의 작가 조반니노 꽈레스키(‘돈카밀로와 빼뽀네’의 저자, 1908~1968)가 자전거를 묘사한 글을 다시 한번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이 글귀를 보면 그가 단순히 1940년대 후반 이탈리아의 한 시골 마을의 자전거를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그 곳에 사는 인간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으며, 삶의 진정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지 잘 드러나 있다. 이 한 대목의 소개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곳 골짜기 마을에서는 모두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도시사람들의 자전거는 정말 꼴불견이다. 반짝거리는 부속품들, 발전기, 기어, 바구니, 속도계 등 이런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다리운동이나 할 때 쓰이는 장난감에 불과하다. 진짜 자전거는 무게가 적어도 20㎏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페인트칠이 거의 다 벗겨지고 페달도 한 개쯤만 남아 있어야 한다. 한쪽 페달은 쇠만 남아서 그 쇠가 신발에 닳고 닳아서 반짝반짝 윤이 나야 하지만, 반짝이는 건 그것뿐이어야 한다, 핸들 손잡이도 고무가 벗겨져야하고 바퀴도 어느 한쪽 방향으로 12도쯤 기울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진짜 자전거는 뒷바퀴에 진흙받이가 있어서는 안되고 앞바퀴 정도에만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될 수 있으면 낡은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것이어야 한다. 이 골짜기에서 쓰이는 자전거에는 브레이크 따위는 붙어있지도 않다. 그리고 바퀴에는 땜질을 더덕더덕 해놓아서 자전거가 갈 때마다 껑충껑충 튀어올라야 하는 것이다. 이 마을의 풍경에는 그런 자전거가 어울린다. 날씬하고 반들반들한 새 자전거를 이런 곳에서 타봤자 건장한 시골 아낙네들 앞에서 도시의 삼류댄서가 초라하게 거들먹거리는 꼴밖에 안된다. 도시 사람들은 이런 멋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소설 ‘돈까밀로와 뺴뽀네’시리즈 중에서)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 꽃에서 천국을 보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혜안은 아니더라도 자전거 한 대를 바라보는 시선에서조차 우리는 충분히 작가의 조국산천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그 땅에 성실히 발붙여 사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느낌이 6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주변의 사물들을 찬찬히 다시 둘러보게 해주는 아날로그적 힘의 원천이 되는 듯 싶다.  
 

오한샘  / EBS 교양문화팀 PD 


 

1991년 입사해 <예술의 광장> <시네마천국> 등 문화, 공연 예술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  <장학퀴즈> <코라아 코리아> 등이 있다. 영화, 음악 그리고 미술 등에 조예가 깊으며 현재 연재하고 있는 영화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미술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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