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진의 타블라 라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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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진의 타블라 라싸]
  • 이응진 KBS PD
  • 승인 2007.10.25 17:16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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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 살 때부터 넥타이를 매기 시작한 사람이다.

놀라진 마시라! 그렇다고 내가 재벌이나 갑부집 아들이란 뜻은 전혀 아니다. 열 살짜리 내게 넥타이를 매어 준 사람은 물론 어머니셨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버지의 중고 넥타이를 질끈 묶어주시고 내 등을 툭 치며 말씀하셨다.

“나가서 열심히 뛰어 놀아라!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때 어머니가 넥타이를 매어 준 곳은 내 목이 아니라 내 여린 허리였다.

혁대 대신 바지 허리춤에 아버지의 낡은 넥타이를 꽉 묶어주시며 안심하고 뛰어놀라 하셨던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세대의 바지는 대개 고무줄로 된 허리띠였다. 그 고무줄이 갑작스레 끊어져 겪어야 했던 ‘싸나이’로서의 황당한 추억들! 내가 처음 만난 ‘넥타이’는 그런 낭패를 막아준 고마운 허리띠로서의 넥타이였다. 얼쑤!

그 후 언제, 어떤 이유로 넥타이를 매기 시작 했는진 정확치 않다.

짐작컨대 대학 입학하던 해, ‘첫 미팅’ 때가 거의 확실하다. 당시의 미팅은 애국가만 안 불렀지 아주 경건한 경축 행사 같았다. 그 경축 이벤트를 위해서 나는 삼촌 방에 잠입(潛入)해 넥타이를 훔쳤고, 그 문화적 장물로 촌놈을 신사인양 위장했던 기억이 난다.

사족을 달자면 그때 내 넥타이 전략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내 이성 교제의 첫 파트너인 그녀가 아예 다방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좌절감이란! 나는 홀로 주점에 앉아 미팅에 성공한 친구들이 파(罷)하기를 기다리며 막걸리를 들이켰다. 물론 술집 한 구석엔 삼촌의 넥타이가 저 홀로 팽개쳐져 괄시를 당하고 있었다.

사회인이 된 후에도 넥타이는 여전히 내게서 괄시받는 존재였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일은 전투를 치루는 일과 무척이나 흡사하다. 그래서 드라마장이에게 넥타이란 마치 전투장이가 애인에게 받은 향수 선물 같은 것이랄까? 늘 곁에 스탠바이하고 있지만 왕의 내방을 받지 못하는 궁녀 같은 신세가 드라마 감독들의 옷장에 걸린 넥타이가 아닐까 싶다.

근데 몇 년 전 글쟁이 후배 때문에 상황은 역전되었다.

시인(詩人)인 후배는 유명출판사의 부탁으로 3개월간 유럽여행을 다녀온 후 멋진 여행가이드북을 냈다. 그는 책 서두에 큼직한 글씨로 결론부터 써버렸다.

“여행에서 대접을 원하면 넥타이를 매라!”

저 북유럽의 스톡홀름에서 스페인 남단 안달루시아까지 온갖 문화유물과 다양한 사람들을 탐색하며 다닌 그가 쓴 여행기의 한 대목은 이렇다.

“여행에 지쳐 공원 벤치에 앉을라치면 옆자리 여인이 얼른 자신의 소지품을 가슴팍에 끌어안는다. 그런 일은 유럽의 모든 곳에서 벌어진다. 처음엔 못된 차별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마주쳤다. T셔츠에 등산 조끼를 걸치고 운동모를 눌러 썬 홈리스 같은 사내. 나라도 내 가방을 가슴팍에 끌어안을 만 했다.

다음 날 멋진 넥타이를 매고 여자들 옆에 앉아 보았다. 그리곤 내 여행기의 결론을 얻었다! ”

그렇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세상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마주쳤던 일상이고 경험이었다.

후배 글을 읽고 난 몇 일 후, 나는 그 동안 괄시했던 내 옷장 속의 넥타이를 주섬주섬 끄집어냈다.


남자가 넥타이를 맨다는 것은 신사(紳士)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예의와 명예를 중히 여기며 늘 약자 편에 서고 여자를 보호하겠다는 다짐의 매듭이다.

5백년 된 고목에 영혼이 살듯, 이제 5백 살 된 넥타이에도 영혼이 살아간다.

옛날 여인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가 간통의『낙인』이었다면, 이 시대 남성의 목에 매여진 넥타이는 신사의『낙관』이다.

그래서 나는 곧 세상으로 나갈 내 아들에게도 내 어머니처럼 넥타이를 매어주며 말하려 한다.


“나가서 열심히 살아라.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된다, 네가 신사라는 사실을!”

이응진 / KBS 드라마팀 PD , 문화칼럼니스트
대표작으로 1994년 최수종과 배용준. 그리고 이승연,최지우가 출연한드라마 <첫사랑>과 <딸부자집> 등이 있으며  2004년 KBS 연수원 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HDTV 문학관' 을 제작 중이다.  '타블라 라싸'는  흰 백지 상태를 의미한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순백의 상태를 말하듯 철학자 루소는 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이 말을 사용했다. 흰백지 위에 생각을 쓰자는 의미에서 이 칼럼이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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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지망생 2007-11-15 21:40:58
"'맛깔나는 글', '사람 냄새가 나는 글'이 바로 이런 거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글에서 깊은 생각과 감동을 얻고 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이응진 2007-11-15 10:22:15
댓글이 더 감동적이네요! 감사!

김지완 2007-11-13 09:49:04
감동적입니다. 장롱을 열고 아내의 색색가지 밸트와 함께 걸려있는
넥타이를 다시 만져 보았읍니다. 오랜세월 매지 않고 걸어놓은 나의 넥타이처럼 신사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구나하고 반성을 해봅니다. 넥타이를 매는 행위 어떤 노래의 제목처럼 아름다운 구속일 겁니다.나도 이제 늦은 나이지만 이 구속을 즐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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