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토론문화, 이대로 좋은가?

|contsmark0|mbc <정운영의 100분 토론>이희수 방송비평전문웹진 ‘방/송/사/고’ 준비위 회원
|contsmark1|tv 화면을 주시하고 있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시청자들을 향해 쉴 새 없이 이야기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어떤 형태로든 그들은 오직 시청자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도 시청자들은 늘 공허함을 느낀다. 동네 싸움에 참견하듯이 ‘이건 이렇게 해야지’라는 말을 해주고 싶을 때가 순간순간 생겨나는데도 딱딱한 tv 화면을 부여잡고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여러 통로로 시청자와의 간접적인 대화 시간이 각 프로그램마다 존재한다.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에 관한 의견을 보내기도 하고 전화로 참여할 수 있는 여론조사 등을 통해 tv와의 대화를 시도한다.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적극적인 수용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만한 첨단 도구들을 갖추고 있다. 라디오에 듣고 싶은 음악을 신청하기 위해 손가락이 닳도록 전화기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아무리 밀어 넣어도 들어가지 않는 팩스 용지를 손에 땀이 배도록 쥐고 있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단 몇 초만에 방송사 제작진의 손안에 나의 의견을 쥐어줄 수 있다. 이를 기반으로 한 요즘 세대의 새로운 무기는 ‘토론’이다. 수능 세대는 대학에 가기 전부터 어떻게든 토론에 익숙해져야 하고 신문 사설에 익숙해져야 한다. pc통신이나 인터넷에도 사이버 공간을 임대한 토론의 장이 지나칠 정도로 활발하다. 부당하게 청구된 핸드폰 요금 문제부터 한국의 공식 명칭을 ‘korea’가 아닌 ‘corea’로 하자는 주장까지, 토론의 주제도 다양하다. 대화방처럼 즉각적인 대응이 이루어지지는 않더라도 각 토론의 장에는 나름대로 방장이라 불리는 진행자가 있고 토론 기간이 정해져 있으며 토론에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한 사람들은 제재를 받는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방법뿐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듣는 방법까지, 기성세대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요즘 세대들은 세련된 패널이 될 자격들을 갖추고 있다.이제는 생방송 토론 프로그램이 좀 더 현실적이고 재미있어질 때도 됐다는 기대감에는 이러한 배경이 한 몫 하고 있다. 굳이 n-세대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tv에서 생방송으로 토론 프로그램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손쉬운 ‘남의 이야기 끼어들기’이며 가장 보기 편한 ‘토론 방법의 매뉴얼’이라는 점에서 외면할 수만은 없는 장르다. 그래서일까. 20세기의 마지막 가을 개편에 마치 밀린 숙제하듯이 각 방송사마다 서둘러 심야 토론 프로그램들을 포진시킨 까닭은. 그 중 mbc의 야심작 <정운영의 100분 토론>이 초반부터 눈길을 끈 이유는 주제가 주는 참신함이었다. 중앙일보 문제를 화두로 해서 언론 개혁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고 하니, 이야말로 생방송 토론 프로그램의 진수를 맛볼만한 짭짤한 주제가 아닌가!그러나 개편을 맞아 교양 프로그램이라는 칭찬을 등에 업고 (외압이라는 소문도 꼬리처럼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출발한 첫 방송은, 허탈하게도 코미디로 끝을 맺었다. 기존의 토론 프로그램들이 이미 충분히 보여줬던 어수선한 토론 방식에 덧붙여 패널들의 선정 문제로 치유할 수 없는 흠집을 남긴 것이다. 진행자 정운영 교수의 카리스마가 담긴 표정과 목소리가 이 프로그램의 예고편을 가득 채웠었고 그 당시 가장 흥미진진했던 주제인 소위 중앙일보 사태를 주제로 선정하는 발빠름과 용감함을 보여줬지만, 진행자나 패널들이 연예인이 아닌 이상 부실한 내용으로 시청자들을 잡아놓을 수는 없다. 아무리 싸움 구경 좋아하는 우리들이지만 나의 귀중한 안방에 단지 리모콘을 조작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으로 침범한 화면들이 100분 동안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면 이유 없고 명분 없고 방향 없는 싸움이 곱게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남다를 것 같았던 이 프로그램은 빠른 속도로 기존의 토론 프로그램 틀 속에 묻히고 있다. 3회 방송의 주제는 ‘성(性) 표현의 한계, 어디까지인가?’라는 것이었다. 외양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주부 대상 프로그램도 아닌 심야 토론 프로그램에서 성 문제를 100분간이나 이야기한다니, 그들은 과연 성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할까? 그러나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단지 토론 프로그램에 성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사실이 새로울 뿐, 매일 밥상에 올려지는 똑같은 반찬들이 지겹듯이 각 매체마다 쏟아지고 있는 성 담론이 거의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물론 이러한 시니컬한 반응에 가장 큰 몫을 한 부분은 최근 서갑숙의 성 체험 고백서와 영화 <거짓말>이 가져온 일련의 파장들이었다. 그리고 각계 각층에서 모셔놓은 패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러한 염려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확인만을 거듭하게 된다. 진행자 정운영이 밝힌 대로 ‘토의(discussion)가 아닌 논쟁(debate)을 지향한다’는 취지를 아무리 곱씹어봐도 이들의 모습은 토의도 논쟁도 아닌 ‘떼쓰기’에 가까웠다. 편협한 의견들이 오가지 않도록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수고를 했지만 각 분야에서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은 이 토론장에서도 모두들 전문가 행세를 잊지 않았다. 대학의 교수도, 영화배우도, 잡지의 편집장도, 검사도, 이 시간 이 장소에서만큼은 성 표현 문제의 전문가가 되다니. 아무리 다양한 사고방식으로의 접근도 좋지만 그렇게 전문가가 많아서야 어디 투명하게 남의 의견 경청하기가 쉽겠는가. 4~5회에 걸쳐 논의된 교육 문제는 수능시험을 전후로 배치시킴으로서 역시 참신한 주제를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보다는 시류의 흐름에 가볍게 무임승차했다는 느낌을 읽어내게 만든다. 스튜디오에 학생들을 잔뜩 앉혀놓아 봐야 무슨 소용인가? 결국 속시원하게 학생들의, 교사들의, 교육 관계자들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하나 건진 것 없이 잊혀지게 되는걸.패널들의 문제점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사회자의 ‘지나치게 온순한’ 진행 방식이다. 어미 제비가 새끼 제비들에게 골고루 먹이를 나누어주듯이, 각 패널들에게 공평한 시간을 분배하느라 토론의 맥을 놓치기 일쑤다. ‘짧게’를 강조하며 토론이 늘어지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의무감, 초지일관의 표정과 돌발상황에도 당황하지 않는 지나친 침착함이 ‘토론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게 만들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얼마 전 영국의 bbc 라디오 방송에서는 미국의 전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상대방의 자극적인 질문에 매우 화를 내며 토론 도중에 자리를 뜬 사건이 있었다. 분명 방송사고에 가까워 보이지만 bbc의 공식 입장은 그들의 논쟁이 토론을 즐겁게 했다는 것이었으며 다만 토론장을 떠났다는 것은 유감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의 대통령 후보인 조지 부시는 한 tv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세계 지도자들의 이름을 몰라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일도 있었다. 위기를 모면하려 끊임없이 빠져나갈 구멍만 찾던 부시가 원망스러운 사회자를 공격하려 하자 사회자는 재치 있고도 날카로운 일침으로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줬다. tv를 지켜본 사람들은 부시의 태도에 대해 왈가왈부 할 뿐 아무도 이들 토론 프로그램 자체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의 토론 프로그램이 주는 씁쓸한 뒷맛은 패널들의 태도나 내용뿐 아니라 토론의 기본적인 형식에서 더 강하게 우러난다는 아쉬움이 있다. 다음의 토론 주제로는 ‘토론 문화 이대로 좋은가’로 하라는 어느 네티즌의 푸념을 단지 의무적인 ‘시청자와의 대화 완료’를 위안 삼아 흘려버릴 것인가.
|contsmark2||contsmark3|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