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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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PD의 눈]최근영〈KBS스페셜〉PD
  • 최근영〈KBS스페셜〉PD
  • 승인 2008.03.0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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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영〈KBS스페셜〉PD

옛날 옛적 삼성카드의 TV광고에 관한 기억. 정우성와 고소영이 모델이었는데 정우성이 고소영에게 멋진 식사를 대접하고는 카드를 긁는 순간,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라는 카피가 뜬다. 그 광고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너무 즉물적이고 나이브해서 나는 마치 대낮에 벌거벗은 사람을 갑자기 마주친 것처럼 낯이 뜨거워졌었다.

▲ 최근영〈KBS스페셜〉PD

그것과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카드대란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물론 그 후에도, 광고의 즉물성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인생을 즐기라고 아버지가 말하셨다는 주장이 경쾌한 리듬에 실려 사람들 사이에서 불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을 조금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광고는 오히려 고상한 수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보여줄 능력이라는 게 그다지 대단하고 사치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저 직장을 갖고 가끔 가족들과 외식을 하고 후배들에게 술을 사주고 여름에는 휴가를 가고 차가 오래되어 말썽을 피우면 새 차를 사고 아이들이 커가니 집을 넓히려고 하는 것뿐이다. 그야말로 ‘남들 다 하는 기본’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하다. 보여주어야 할 능력은 여기저기서 요구되는데 아무래도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88만원세대의 젊은이들을 취재하면서 그들의 화려한 능력에 놀랐다. 고득점의 토익은 기본이고 해외연수 및 교환학생, 인턴십, 자격증에 제2외국어까지! 거기다 자원봉사경력이 있으면 화룡점정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를 아직 모자라다고 아직은 ‘스펙’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 겸손함이야말로 충격적이다. 그러한 겸손함은 취업준비생들만의 태도가 아니다. 돈 버는 기계처럼 일하는 충직한 가장들마저도 술을 마시면 항상 가족들에게 미안해한다. 내 능력이 모자라서 더 좋은 음식과 더 좋은 교육과 더 좋은 집을 제공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이 요지다.

 나는 이 자학적인 겸손함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품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거대한 페시미즘과 염세주의에 기초한 음모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합의라도 한 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인다. 한편 그러한 음모마저도 우리 스스로 불러들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소비자의 입장에 섰을 때 우리는 얼마나 까다로운지, 조금이라도 덜 편한 것은 참을 수 없고 아주 작은 비효율이라도 당장 개선되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한다.

이러한 능력 키우기, 능력 보여주기의 게임에서 별로 승산이 없어 보이는 나는 아예 다른 능력을 추구하기로 했다. 그냥 쉽게 만족하는 능력. 다소 불편하더라도 그냥 살자. 다소 못났더라도 그냥 만족하자. 덜 떨어지더라도 그냥 헤헤거리고 말자. 그런데 그 능력 또한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최소한 남과 싸워야 하거나 내 것이 많아지면 남의 것이 적어지는 종류의 능력은 아니다. 그러니 좀 더 편안하게 추구할 수 있다. 그 순간 자신의 행위에 깨어있는 것. 그것이 만족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많은 지혜로운 분들이 가르친다. ‘순간의 감식가’가 되는 것. 그것이 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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