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널리스트에게 관대한 미국 … 문제는 '쏠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왜 대한민국 언론인은 한나라당, 청와대로만 가는가?

선거 때만 되면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 미디어계의 인사들이 구설수에 오르더니 이번 선거에도 그 수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신문사 기자들이 그러는 것이야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이제는 방송사의 프로그램 진행자들이나 방송기자들이 정치인으로 등장하는 것도 낯설지 않다. <PD저널>의 기사 (기획특집: 폴리널리스트)처럼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곰곰이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시각의 대부분은 어제까지 공정보도를 하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바로 그 다음날 특정정파로 옮길 수 있냐는 비판에 기반을 하고 있다. 언론의 기본 두 기능에는 보도와 비판이 있다. 보도에서는 최대한의 개인 의견을 절제하고 사실의 전달에 목표를 둔다면, 비판은 이런 사실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실보도란 것도 일정정도의 취사선택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언론인이란 어쩌면 기본적으로 정치인이 될 숙명을 띄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보도 대상을 선정하고 비판을 한다는 것은 이미 사회에 진행되고 있는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토니 스노우 전 백악관 대변인. 사진제공=AP

미국에서는 이런 것이 어떻게 이해될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예가 있다. 그 하나는 버몬트주의 한 기자가 상원의원 선거 기간 중에 선거담당 기자로 한 의원후보를 담당하다가, 선거가 끝난 뒤 6개월 후 당선된 그 후보의 대변인으로 자리를 옮긴 경우이다.  이 신문사는 이 기자의 취재가 적절했나에 대한 기사를 내기는 했지만, 결국 문제는 기자들의 양심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 사례가 사실보도를 담당하는 일선 기자의 예라면, 지난해까지 미국 백악관 대변인이었던 토니 스노우는 논평 쪽의 사례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뉴스채널 폭스뉴스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인기를 쌓고 있던 스노우는 2006년 6월에 부시 정권의 세 번째 대변인으로 리비 스캔들로 악화되고 있던 언론 관계를 복원시키기 위해 투입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첫 번째 백악관 입성은 아니었다. 그는 첫 번째 부시정권에서도 연설 작성자로 일하다가 폭스로 옮겨서 진행자로 나선 것이다. 그러니, 젊었을 때의 신문기자 생활까지 따지면, 언론과 정치계를 네 번에 걸쳐 넘나든 것이다.

한국 같았으면, 논란이 많았겠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오히려 스노우의 부시 비판 기록이 논란이 되었을 뿐, 이 사람이 직업을 바꾸는 데는 별 큰 소란이 없었다. 그 이유는 스노우가 일하고 있던 폭스 쪽 언론사의 당파성을 인정하고, 오히려 공화당 쪽에서는 그의 인기를 이용하려고 대변인에 임명한 것이다. 자기가 방송에서 주장하던 정치관을 직접 실행에 옮기겠다고 실제 정치에 뛰어든다는데, 이게 무슨 신뢰성과 관련이 있겠는가?

결국 문제의 핵심은 사실보도와 논평의 차이에 있지만, 언론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그것은 언제나 종이 한 장의 차이에 불과했다. 막스도 한때 신문사 기자가 아니었던가? 신문사가 한 두개가 아닌 것은 그 다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조선은 어떤 경향의 신문이고, 한겨레는 어떤 쪽의 신문인지를 알고 읽고 대하는데, 이들이 절대 중립이라고 우기는 것은 좀 낯간지러운 일이다. 신문사든, 기자든 개인으로서 자신의 정치관을 가질 수 있고, 그러면서도 보도에서는 최대한 공정하면 되는 것이다. 기사가 조작되지 않는 한, 기자의 가치관은 어디에나 배어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언론인의 기본 바탕은 조작과 사실의 차이에 있지, 정치를 포함한 사회와의 유리에 있지 않다. 오히려 적극적인 언론인의 사회 정치 참여가 민주주의 토론에 더 많은 기여를 할 가능성이 많다. 진보이념을 가진 20세기 초 미국 탐사보도들이 이 후 저널리즘의 모범이 된 것도 그들의 사회 참여에 있었다. 기업체 사장도 대통령을 하고, 판검사들도 줄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서고, 교수들도 수업 빼먹고 선거 운동하는데, 왜 언론인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사회의 관심은 교수들이 그러면서 학생을 잘 가르치냐듯 언론인들이 자기 일을 성실히 수행하느냐에 있어야 한다. 진보언론이 진보 쪽의 시각을 충실히 담아내고, 보수도 그러할 때 민주주의 사회의 대화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히려 우리가 걱정해야 할 부분을 다른 곳에 있다고 본다. 왜, 방송인들은 정치인으로 전향을 하면 양지로만 가는지, 보수쪽으로만 가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문제이다. 공영방송이라면, 사회의 다양한 시각을 담아야 하는데, 왜 방송사 출신의 정치인들은 유독 한나라당에만 많고, 청와대 쪽에서 일하길 원하는지, 또 대기업 홍보실이 퇴직 후의 최고의 일자리가 되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런 작게는 방송사, 크게는 언론계 전체의 우편향이 한국 사회에서의 균형있는 대화에 얼마나 득이 되고 해가 되는지 생각할 문제이다.

▲ 샌프란시스코 = 이헌율 통신원 / 샌프란시스코 주립대 교수
언제나 정치의 계절이 되면 자리를 옮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직업 정치인만이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될 수도 없기에 학교에서, 기업에서, 노동조합에서 새로운 정치인들이 탄생을 할 것이다. 언론인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사회가 눈을 부릅뜨고 기록해야 할 것은 공영방송에서 얼마나 다양한 분야로, 즉 보수 쪽으로 얼마나, 또 진보 쪽으로는 얼마나 가는 가이다. 지금처럼 한나라당으로 치우쳐진 결과는 한국의 공영방송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