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장엽 비서, 당신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오기현< SBS 시사교양국 >

|contsmark0|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황장엽 씨, 우리는 당신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찾아온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이 예의인줄 압니다만, 70 노구를 이끌고 어려운 발걸음을 한 당신을 우리가 달가워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먼저 당신이 망명신청을 한 시기가 석연치 않습니다. 알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연말부터 우리 정국은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파동으로 큰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건국 이래 최대의 스캔들이라 불리는 한보사태마저 터져 문민정부는 도덕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존립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지난 2월 12일 그 순간 황비서 당신께서 망명을 신청하신 것입니다.사실, 북한의 권력서열 24번째로 노동당의 외교담당 책임자가 남쪽으로 망명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체사상을 체계화시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황비서의 망명은 주체사상의 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북한 지배이데올로기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닥쳐올 통일과 한반도 전체의 혼란상황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하지만 황비서, 곧이어 우리는 당신의 망명시점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망명이 정권이 위태로울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국면전환용 안보카드’가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당신이 망명한 그날 한 방송사는 저녁뉴스의 머릿부분 30분을, 다른 두 방송사는 20분씩을 당신 소식에 할애했습니다. ‘누르 황(黃)’ ‘길 장(長)’ ‘불꽃 엽(燁)’자가 신문에 너무 자주 등장해 한문에 어지간히 조예가 없는 사람도 당신 이름 외우는 데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국민모두의 관심사였던 ‘5조원의 행방’은 당연히 단신(短信) 수준으로 밀려났습니다.‘남한에 고정간첩 5만명이 암약한다’는 당신의 얘기가 전해지자 또 다시 거센 북풍이 몰아칠거라고 사람들은 몸을 움츠립니다. 당신이 한국에 도착한 뒤 벌어질 예정된 놀음에 미리부터 식상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도된 주제에다 공급된 자료그림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방송프로듀서들이, 방송말미에 자신의 이름 석자 띄우길 주저해야 할 일이 재연될지 모릅니다.당신의 본의든 아니든 당신의 행동은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정권안보논리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행동을 한 지성인의 죽음을 무릅쓴 고뇌의 결단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contsmark1|황비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이유에서 당신의 망명을 환영하지 않습니다.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신은 북한의 대표적 주체사상이론가로 김정일 우상화작업을 주도해온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일생동안 몸바쳐 연구하고 체계화한 그 사상은 남쪽의 체제이데올로기와 적대되는 개념이며 남북분단을 온존케 한 원인으로 지목돼왔습니다. 당신의 사상을 좇았던 남쪽의 많은 청년학생들이 감옥에 갔고 그것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사상적 단죄를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그런데도 당신은 ‘우리민족을 불행에서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신이 진정 책임을 느낀다면, 노동자 농민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이상사회를 건설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북녘정권의 잘못부터 바로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먹을 것을 찾아 산과 들을 헤매면서도 우리식 사회주의를 맹신하는 동포들의 환상을 깨뜨려야 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고매한 인격과 정연한 연구업적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적 오류를 깨닫게 하는 힘든 작업은 과연 누가 해야 합니까?당신이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했다면 북을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일흔이 넘는 원로로서 한 집단의 사상적 대부라면 그 집단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 집단을 바른 길로 이끄는 일에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contsmark2|황비서!저희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신과 당신 가족의 신상에 관한 일입니다. 저희 상식으로 북에서는 가족중 한 사람이 월남할 경우 다른 가족은 혹독한 처우를 받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망명으로 단란한 가족의 평화가 깨지고 부인과 자녀 그리고 어린 손자손녀가 입을 피해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습니다. 가족제도를 중시하는 남쪽에서는 이런 이유로 당신의 망명에 정서적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contsmark3|황비서!개인적 고뇌를 넘어선 민족적 열정을 이해못하는 저희들의 좁은 소견을 나무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가 두려워 당신의 입국을 꺼리는 불순세력의 의도는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contsmark4|노동당 국제담당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황장엽 씨,‘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우리말이 있습니다. 두 손을 부여잡고 따뜻이 당신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환영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같이 가슴아파해 주시기 바랍니다.
|contsmark5|
|contsmark6|97년 3월 30일서울에서 오기현 배상(拜上)|contsmark7|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