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과 전지현 그리고 뉴타운이라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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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PD블로그] 이성규의 빨간 구두의 마법에 걸린 PD

한 달 동안 인도에 있었던 데다, 돌아온 이후 12일 동안 대구 집에서 딸아이 보느라 국내 소식과 담을 쌓을 수 밖에 없었다. 딸 아이 보면서 텔레비전을 켜도 소리를 완전히 줄인 채 보는지라 자막에 의존하여 단편적인 정보만 간간히 얻는 정도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텔레비전을 통해 몇 가지 소식은 접할 수 있었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라는 해프닝은 SBS로 채널만 돌리면 오른쪽 상단에 자막이 붙박이 처럼 뜨는 걸 볼 수 있었다. 물론 우주에 대한 관심의 지평을 넓힌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번 우주인 이야긴 해프닝으로 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요란하기만 했다. 우주선을 탔고 우주에 나갔으니 당연 우주인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최초인 우주인이라고 하는 이소연씨를 러시아측에선 탑승객 혹은 참관인 정도의 호칭 정도로 분류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인 최초의 우주관광객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솔직한 용어가 아닐까 싶다.

TV광고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게 있었는데, 전지현이 등장하는 CF였다. "여자친구가 전지현보다 좋은 이유는 만질 수 있어서다." 처음엔 뭔가 싶었다. 이동전화기 광고의 카피였다. '어! 카피 죽이는데¨' 광고의 이미지가 주는 강렬한 메세지에 감탄을 했다.

지난밤 여의도 작업실로 한 달 반만에 돌아와 그동안 밀린 세상 소식들을 밤새도록 읽었다. 그 가운데 이택광님의 블로그 에서 읽은 글 하나는 자본주의의 달콤한 이미지에 내 자신이 얼마나 중독됐는지를 발견하곤 스스로 충격을 먹었다. 물론 반성도 하면서 말이다.

▲ 애니콜 광고
전지현과 여자 친구

“전지현보다 여자 친구가 좋은 이유는 만질 수 있어서다”고 한 휴대폰 광고는 말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말한다. 당신은 여자 친구도 만질 수 없다고. “성관계”가 있을 수 없는 남녀의 욕망구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은 결코 서로의 결여를 채워줄 수 없다. 언제나 상대방이 완벽한 대상이길 바라지만, 결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가설은 너무 원칙론이다. 이런 원칙의 문제를 떠나서, 전지현보다 여자 친구가 좋다는 진술을 더 파고 들어가 보면, 훨씬 더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의 모순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때 드러난다. 전지현보다 여자 친구가 좋은 이유가 만질 수 있어서 그렇다는데, 그렇다면 전지현이 없는 경우는 어떨까?

놀라운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지현이 없다면, 여자 친구도 좋을 이유가 없다는 진실 말이다. 전지현은 좋지만, 만질 수가 없다. 여자 친구는 전지현보다 좋지 않지만 만질 수 있다. 그래서 이 발언의 화자는 전지현보다 여자 친구를 더 좋다고 한다.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지현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전지현이 없으면, 여자 친구를 만지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지현이 있기 때문에 만질 수 있는 여자 친구가 ‘더’ 좋은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욕망의 대자성이다. 욕망의 문제는 언제나 대자적이다. 전지현이라는 대자적 관계가 없다면, 여자 친구에 대한 나의 욕망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 욕망은 언제나 타자(Other)의 욕망이다. 여기에서 타자라는 것은 나의 의식이 통제할 수 없는 상징 질서이며 법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 욕망은 타자의 담론이다. 내가 전지현보다 여자 친구가 좋은 이유를 말할 때, 그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대타자, 다시 말해서 휴대폰을 사도록 광고하는 ‘자본주의’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여자 친구도 만질 수가 없다. 당신이 만지고 싶은 건 여자 친구가 아니라 전지현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손길이 더듬는 살(flesh) 너머에 전지현은 있다. 가 닿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으로 전지현이 있는 것이다.

당신의 여자 친구를 만지는 욕망은 이미 전지현이라는 불가능한 대상을 향한 것이다. 비록 당신이 여자 친구를 만지더라도, 당신은 전지현을 욕망하고 있다. 그리고 전지현이라는 기표가 은밀하게 가리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쾌락이다. 오직 자본주의를 즐겁게 하기 위해 우리는 전지현을 욕망한다. 욕망의 법칙은 이런 것이다.

당신은 전지현도 여자 친구도 만질 수 없기에 휴대폰을 사야한다. 법의 명령은 이것이다. 당신이 전지현 뿐만 아니라, 여자 친구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간계가 바로 ‘신형’ 휴대폰이다. 자신의 욕망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낼 때, 당신은 ‘언제나 이미’ 자본주의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이택광님의 블로그 WALLFLOWER에서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다. 꽃은 아름답다. 잘 만든 광고는 아름답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욕망은, 꽃을 꺽고 마는 소유욕을 자극한다. 전지현과 여자친구는 욕망의 대상이면서 대자적인 함수관계로 감춰져 있다.

이소연씨와 우주인의 관계도 대자적인 욕망의 표출이다. 중국의 우주인 이후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 신화는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욕망으로 표출되고 있다.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는 돈만 있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곳이 됐다. 그러기에 자력이 아닌 상태에서 전문가의 도움으로 거액의 돈을 들여 에베레스트 등정을 하는 경우, 산악인들은 그 등정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 신화가 그렇다.

포퓰리즘은 선전 선동의 방편이다. 대중은 너무도 쉽게 포퓰리즘에 속는다.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신화 그리고 지난 총선에서 보여진 뉴타운의 허구. 진실은 항상 승리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구호에 그친다. 이미지에 승부를 걸고 대중을 속여 그것이 인기와 판매증가 그리고 선거에서 숫자로 나타낼 때, 진실이란 권력이 된다. 어느덧 우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질주하고 있을 뿐이다.

2008년 4월 23일(수) 여의도 작업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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