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제작기]보수의 땅에서 진보 싹 틔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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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MBC 총선특집기획 <진보의 이름으로 도전>

“양쪽 날개가 있어야 푸른 하늘을 나는 새처럼 민주주의도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이루어야 발전합니다. 대구 경북지역에서 진보의 싹을 틔우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방송 다음 날, 프로그램의 엔딩 자막으로 이런 내용을 내보내고 무사(?)할 리 없을 것이라고 단단히 각오하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하지만 간밤의 회사 전화기들은 조용했다고 했고 게시판에는 방송 잘 봤다는 글들이 올라왔을 뿐 비난은 없었다. 적어도 대구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라면 할 수 있었던 얘기라고 넘어 가주는 건지, 아니면 또 한 번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승자들의 아량이었는지 판단이 안 섰지만 아무튼 이런 정도의 프로그램을 받아 들여 줄 수 있는 대구의 변화가 고마웠다.

사실 대구경북은 진보적인 기운으로 넘쳐나는 역동적인 지역이었다. 동학의 태동, 일제강점기의 국채보상운동으로부터 해방 직후인 1946년 미군정과 보수반동세력에 대한 저항운동인 ‘대구 10월항쟁’, 부패로 얼룩진 자유당 정권을 종식시킨 도화선이 된 ‘2.28 학생의거’, 이른바 인혁당사건 조작으로 비극이 된 70년대 유신독재반대운동의 지역 중심지도 대구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쿠데타로 시작된 군부독재가 전두환, 노태우의 집권까지 30년간 이어지며 수구 기득권 세력들과 결합한 지역의 정서는 급격히 보수화의 길로 들어선다.

 대선, 총선, 지자체선거를 막론하고 ‘묻지마’, ‘싹쓸이’ 선거의 결과는 정치의 황폐화를 불러왔다. 대안, 견제세력의 부재로 인한 일방적인 의사결정과 정책대결의 실종은 필연적으로 부패와 정치 혐오증을 낳고, 변혁을 꿈꾸는 정치 신인들은 그러한 분위기에 질식당하는 후진적인 정치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수구꼴통 이라는 손가락질도 아주 오랫동안 받아서 그런지 이제는 그 정도 비아냥엔 대부분 면역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살며 어느 새 부끄러움을, 분노를, 아픔을 느끼지도 못하고 명색이 언론사에 종사하면서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던 우리들…. 하지만 이런 절망스런 분위기에 돌멩이라도 던져보자고 호기를 부린 것은 비겁하게도 회사 옆에 있는 막걸리 집에서였다. 

프로그램은 대구 지역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수성구에 출마한 진보 성향의 정치인 유시민(무소속), 이연재 후보(진보신당)를 중심으로 이번 총선 운동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유시민 후보의 경우 전국적인 지명도 때문에 취재 경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으나 완전한 기우였다. 선거운동 직전까지 유시민 후보의 지지율이 불과 10% 남짓이었으니 지역 언론들조차도 철저히 외면했던 것이다.
후보들을 편안하게 독점할 기회를 잡은 우리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첫째, 선거운동 자체보다는 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후보들의 인간적인 면들을 부각해 보수적인 대구 지역민들이 진보성향의 정치인에 대해 막연히 품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켜보자는 것. 그래서 후보자 허락도 없이 드러내기 싫어하는 부분까지 카메라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지난 정권의 상징이자 장관까지 지낸 유시민 후보의 초라한 집이 공개 된 순간 충격을 받은 시청자가 한 둘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둘째, 현재 강자에게만 유리한 선거운동 방식의 불합리한 점도 지적하고 싶었다. 운동장 유세를 없애고 방송토론을 통해 유권자를 만나게 한 현재의 선거방송토론 제도가 약자인 군소후보, 특히 한나라당과 맞서야하는 대구의 진보적인 후보들에게는 얼마나 유명무실한 제도인지 폭로하고 싶었다. 실제로 각 방송사 별로 토론 일정을 빡빡하게 잡아 놓았지만 한나라당 후보가 나오는 토론방송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이 프로그램은 누가 봐도 노골적이고 편파적이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정당 후보만 찍어주는 지역민들은 진보의 가치를 모르는 생각 없는 사람들이고, 싸움을 회피하는 한나라당 후보들은 비겁하고 오만하게 그렸으니까. 하지만 누구도 이 프로그램의 노골적인 편파성을 문제 삼을 수 없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지난 수십년간 진보의 싹을 밟아버린 바로 이 지역의 극심한 정치적 불균형과 편파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이영환 대구MBC 편성국 PD

이 지역에서는 드문 일이기도 했고, 일간지에서도 기사화 해줘서 제법 관심을 끈 정치소재 다큐멘터리였지만 이 단발성 프로그램만으로 대구 지역 사회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프로그램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진보란 아주 조금의 변화라 할지라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 함께 노력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답답하고 음울하기 짝이 없는 고담 대구에서 푸른 진보의 싹을 틔우고 나무를 키우는 방송동료들을 앞으로 계속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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