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남북 언론인대표자 회의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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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남북 언론인대표자 회의에 다녀와서
금강산에서 본 한 줄기 빛
  • 이채훈 MBC 외주제작센터 PD
  • 승인 2008.05.14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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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과 10·4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 언론인대표자회의가 지난 7~8일 북측 금강산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남북언론이 50여명이 참석해 남북언론인 결의문을 채택했다. 남북언론인대회 주제발표를 진행한 이채훈 MBC PD가 금강산에서의 3일간의 소감을 글로 보내와 싣는다. <편집자주>

금강산을 향하는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북측의 언론인들과 실속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미리 여과된 토론문을 의례적으로 낭독하는 모임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 하나, 더욱 깊은 낭패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북측을 방문할 때마다 혹독한 경제난 속에서 ‘수령님’의 유훈을 필사적으로 지키는 인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북측 사람들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온 힘을 다해 ‘수령님’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과 판이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남측의 민중들은 어떻게 북측의 민중들과 화합하고 통일할 수 있을까? 
북측 사람들의 신념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기 식으로 살 권리가 있고, 그들이 행복하다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준희 남측언론본부 공동대표(왼쪽)와 최창일 북측 언론분과위원이 남북(북남) 언론인대표자회의 공동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대자보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언젠가 남측의 민중과 화합하고 통일해야 할 상대라는 점이다. 알다시피 남쪽에는 김일성 주석을 ‘민족의 불행을 초래한 악의 화신’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그 분의 항일투쟁과 민주개혁은 높이 평가하지만 전쟁 개시의 책임, 정적 숙청과 우상화, 경제 침체와 기아 사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경우가 많다. 가장 좋게 김일성 주석을 평가하는 사람조차 북측 인민처럼 크나큰 사랑과 외경심을 갖고 있지는 않다. 반면에 대다수 북측 사람들은 남측 사람들도 자기들처럼 수령님을 존경하고 사모한다고 잘못 알고 있다. 

‘수령’에 대한 이러한 인식 차이를 그대로 둔 채 통일이 가능할까? 이 상태로 남과 북의 주민들이 만난다면 오히려 주먹다짐만 일어나고 결국 더 큰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이 불씨를 안은 채 통일을 하느니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한 게 아닐까? 반드시 풀어야 할 심각한 문제고, 이 과제를 앞장서서 해 낼 수 있는 것은 공영방송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북녘을 향하는 내게 그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7일 오후 4시경 금강산에 도착하여 숙소에 짐을 놓을 즈음에는 가랑비가 내렸다. 5월의 금강산은 의연히 아름다웠고,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백학순 교수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명박 정부는 ‘비핵 개방 3,000’으로 북측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 결과 남북관계가 경색됐다, 그러나 핵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북미 관계는 정상화될 전망이다, 이명박 정부가 ‘실용’을 추구한다면 남북 협력이 결국 남측에게도 득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치러야 할 대가를 줄여 나가는 언론인의 지혜가 필요하다...” 백 교수의 강연은 긍정적인 전망을 들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수령’에 대한 인식 차이와 해소 방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8일 오전에는 구룡폭포와 상팔담까지 산책했다. 전날 비 때문에 공기가 맑았고 계곡도 시원했다. 머릿속에 얽힌 생각도 잠시 접어두고 금강산의 축복을 누렸다. 오후 3시부터 열린 본 대회에서 북측 대표들은 토론문을 진지하게 낭독했다. 남측 대표들은 구어체로 얘기하듯 발표했다. 정일용 남측 공동대표가 제안한 남북 기사 교류는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고승우 선배가 제안한 여러 가지 유용한 교류 방안들―남북 언론위원회 구성, 공동 신문 제작, 남북 보도용어사전 발간, 북측 방송 연출자 단체 구성 등―은 아예 발표문에서 삭제된 상태였다. 나는 예의상 원고대로 낭독하려고 했지만 영 어색하고 불편해서 자기소개를 한 뒤 미흡한 대목은 살을 붙이고 앞의 발표와 중복되는 내용은 생략하며 이야기했다. 미리 제출한 원고보다 민감한 내용이 많이 들어갔다. 하지만 나의 발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고민의 언저리를 맴돌 뿐이었다.

“북측과 남측의 언론인끼리 좀 더 허심탄회하게 대화했으면 한다, 남과 북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있다면 솔직하게 그 차이를 인정하고 좁혀 나가는 게 옳다, 우리 언론인끼리 먼저 인식의 차이를 좁히고 궁극적으로 방송, 언론 행위를 통해 남과 북 민중들의 인식을 접근시켜 나가야 한다, 공영방송이 아니면 이 과제를 누가 앞장서서 해 내겠는가?” 등등 변죽을 울리는 말만 이어졌다. “김일성 주석에 대한 다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항일투쟁 중심으로 한번 방송한 바 있으나 해방 이후의 일은 아직도 금기다, 남과 북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서 이 프로그램은 꼭 해야 한다, 남측의 공영방송과 북측 방송이 협력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딱 여기까지만 얘기했고 더 상세한 이야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는 ‘북측과 협력하여 이 다큐를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이 발언은 ‘진심’이 아니라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발표 중 ‘김일성’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북측 참석자들은 긴장했다. 남측 참석자들도 내 발언이 위험수위를 넘을까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어느 선까지 말하는 게 용인되는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저녁때 목란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북측 참석자들은 내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며 발표가 좋았다고 칭찬해 주었다. “김일성 주석에 대해 좀 더 깍듯한 존칭을 쓰지 않아서 서운했다”는 북측 참석자들의 분위기를 제3자가 전해 주었다. 술이 좀 오르자 북측 대표 한 분이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께서…”로 운을 뗐다. ‘수령님’께서 해방 직후 남측 언론인들을 접견했고 ‘장군님’께서 6.15 직후 남측의 언론사 사장단을 접견했다, 두 분 모두 통일을 위한 언론인의 역할을 중요시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러나 화합과 통일을 위한 언론인의 사명을 얘기할 때 ‘수령님’과 ‘장군님’이 나오니까 더 이상 깊이 들어갈 수 없었다. 

마지막 날인 9일 오전엔 양측 참석자들이 삼일포를 방문, 함께 산책하며 얘기를 나눴다.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건 즐거웠다. 그러나 양측 언론인의 역할과 협력 방안을 얘기하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혼자 바다를 보며 한참 걸었다. 한 순간, 너무나 쉽고 단순한 사실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3년 전, 김일성 주석 다큐멘터리를 구상하며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우상화가 진행되는 것과 비례하여 북의 경제는 침체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제 뒤집어서 생각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군사적, 경제적으로 북측이 겪는 어려움이 해소된다면 스스로 일인 숭배를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북측이 체제 생존에 대해 좀 더 자신감이 있다면 좀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지 않을까? 미국과의 대립 관계를 풀면서 먹고 사는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면 김일성 주석에 대한 신격화를 완화할 발판이 생기지 않을까?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소하고 테러국 해제, 평화협정 체결, 국제사회 지원 등의 조치가 따르게 되면 비로소 ‘동질성 회복’의 물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당장은 남과 북의 언론인이 만나도 눈에 띄는 소득을 얻어내기 어렵다. 그러나 북측이 좀 더 여유와 자신감을 갖게 된다면 양측 언론인의 역할은 눈에 띄게 커질 것이다. 따라서 남과 북의 언론인은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만나야 한다. 아무 만남이 없다가 갑자기 많은 교류를 할 수는 없다. 좀 더 많은 언론인이 좀 더 자주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언젠가 다가올 전면적인 화합과 통일의 시간에 허둥대지 않고 체계적으로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성 주석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그때는 가능할 것이다. 

▲ 이채훈 MBC 외주제작센터 PD

환상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아무 것도 없다. 미국의 극우파나 조·중·동이 좋아할 만한 ‘북의 체제 붕괴, 주체사상에 대한 탄압, 북측 주민의 개조’와 같은 방법을 택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전 일정을 마치고 온정각 앞에서 북측 참석자들을 배웅했다. 서울로 돌아와 남측 참석자들과 악수를 나눈 뒤 귀가하는 버스에 오를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렸다. 라디오의 9시 뉴스는 “북측이 핵일지를 미국측에 제출했고, 테러국 해제와 경제 지원 등 상응 조치가 따를 전망”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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