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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들이 가끔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10년의 세월을 뚫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앞에서, 스팸 메일 사이에 생뚱맞게 끼워져 있는 “잘 있었어?” 라고 시작되는 한 통의 이메일 속에서, 누렇게 변해있는 시집에 적어놓은 92년 5월의 다짐 속에서 문득 반복되는 일상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5월 10일의 저녁 풍경 또한 그랬다. 10시간의 비행을 마친 그 순간은 기나긴 두 달여의 해외 촬영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머나먼 남태평양 바누아투의 푸른 감수성, 화려한 축제 뒤에 짙게 드리워진 삶의 애환, 검은 색 얼굴 위로 묻어나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들. 행복지수 세계1위라는 화려한 헤드라인 뒤에 숨겨진 야생의 이야기를 가득안고 그렇게 다시 대한민국으로 입국했다.

딱히 낯선 것도, 새로운 것도 없는 익숙한 내 삶의 공간. 그리고 귀환. 하지만 자꾸만 낯설었다. 뭔가 불편했다. 한 끼 식사로 나온 박쥐를 먹지 않아도, 저녁마다 헤드렌턴을 쓰지 않아도, 차를 타기 위해 산 세 개를 넘지 않아도 되었지만 뭔가 불편했다. 회색 빛 도시 위를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자동차의 속도가 불편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도 바쁘게 뛰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불안했고, 어설프게 폭력적인 현실이 불편했다. ‘야만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자랑스럽게 귀환했지만, 나는 ‘편리하지만 불편한’ 아이러니를 예전보다 훨씬 생생하게 느꼈다.

하지만 정작 두려운 것은 이 낯설고 불편한 느낌조차 너무나 빨리, 그리고 쉽게 익숙해져갈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너무나 먹고 싶었던 매콤한 떡볶이 1인분을 먹는 순간,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홀짝거리며 담배연기 한 모금을 내뿜는 순간, 신분증을 회사 출입문에 찍으며 아직 조직의 일원임을 느끼게 되는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기억은 내 식도 안에서, 허공에 퍼지는 담배 연기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익숙하고 편리한 기억은 그렇게 쉽게 낯설고 불편한 기억들을 대체해 나갈 것이다.

▲ 남내원 EBS〈다큐프라임〉PD

흔히 PD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볼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낯선 것을 익숙한 듯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용기 또한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아직 제대로 된 PD가 되기에는 스스로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두 달의 경험이 내게 준 가장 큰 교훈은 다시 익숙해져가는 일상 속에서도 낯선 발걸음을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는 조금의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주 소심하지만 말이다.

p.s) 오늘 아침 내 마이너스 통장에 찍힌 숫자들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잊지 말라는 듯 진하게 인쇄된 7자리 숫자들.
    두 달 간의 출장이 약간의 여유와 용기를 준 것일까?
    익숙하게 버튼을 눌렀다.
    통장에 찍힌 8자리 숫자들.
    후회할까? 후회하지 않을까? 익숙하지만 낯선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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