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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로서 촛불시위를 지켜보며 제일 놀랐을 때는 ‘나 배운 여자야!’라는 깃발을 보았을 때이다. 그래도 인터넷 공간이나 젊은이들을 어느 정도 발 빠르게 이해한다고 자부해왔는데, ‘배운 여자’라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을 뿐더러 촛불집회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학력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저런 차별적 구호가 대체 여기 왜 있는 거냐’ 이런 생각도 들었고, 더군다나 그 배운 여자라는 깃발 아래에는 하이힐을 신고 핫팬츠를 입은 20대 여성들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집회에서 이렇게 부조화를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당장 배운 여자란 말이 왜 나왔는지 조사해 봤다. 배운 여자는 소울드레서 라는 인터넷 패션 카페에서 나온 말이었다. 주로 20대 여성들이 활동하는 카페인 이곳에서 배운 여자란 말은 곧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용한 정보를 회원들의 이익을 위해 적극 공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를 테면 인터넷 문서를 예쁘게 꾸미는 법을 게시판에 올리고선 그 말미에 ‘저 이 정도면 배운 여자로 쳐주실 거죠?’ 라고 쓰는 식이다.

결국 배운 여자란 남을 위해 좋은 행위를 권장하는 이 카페만의 은어인 셈이다. 8만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는 이 소울드레서 회원들은 이번 촛불집회에서 남다른 활약을 하고 있다. 거의 매번 집회에 수백 명에서 천명이 넘는 회원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정부가 미국산 소고기의 안전성을 강조하는 광고를 대대적으로 낼 때, 가장 먼저 회원들 모금으로 사실관계가 다르다는 반박 광고문을 내기도 했고, 코엑스에서 회원들은 민주주의가 멈췄다며 마네킹 놀이 플래시몹을 벌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모든 행위는 배운 여자들의 공익적 활동이었던 셈이다.

지난 번 탄핵 촛불 또한 물론 인터넷 공간이 시위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그때 두드러진 인터넷 집단은 이를테면 디시인사이드의 ‘정치사회갤러리’였다. 적어도 이들은 정치문제를 중심으로 놓은 인터넷 집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번 쇠고기 촛불에는 패션카페회원들과 여중생 여고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정치의제, 시위의제로 놓이지 않았던 생활 문화적 의제와 건강권이란 의제가 이번 집회의 중심의제란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이번 시위의 주체세력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고 각성한 시민이라기 보단, 상식적이고 공익적 권리에 민감한 시민, 즉 ‘배운(공익적) 시민들’이란 사실이다.

배운 여자의 등장에 대해 정부여당과 그 대변지인 조·중·동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들이 처음에 벌였던 배후 찾기 놀이가 대표적인 뻘짓이었던 이유는 쇠고기 촛불시위가 좌파운동권이 조장했을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배후를 찾고 폭력을 찾고 반미를 찾아 헤매던 그들이 발견한 것이라곤 ‘길거리 촛농’ 뿐이었고, 이제 평생 운동이란 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패션과 음식, 육아, 결혼 등이 아주 중요한 관심사인 이 배운 여자들은 조·중·동의 악의적 기사에 맞서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른바 숙제라 불리는 이 운동은 역시 소비자 운동을 했던 여성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강력한 형태의 지혜로운 운동방식이었다. 물건 값이나 소비자 권리, 불매운동에 익숙지 않은 남성들은 몰랐던 이 방식은 조·중·동의 실질적 타격을 입혔고 조·중·동의 지면을 줄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사실 80년대 초 사고방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조·중·동과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배운 여자들 사이의 승패는 상대를 파악조차 못한 조·중·동으로선 이미 아무런 승산도 없었다.

▲ 안주식〈KBS스페셜〉PD

조·중·동과 정부여당의 뻘짓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PD수첩〉을 비롯한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들이 그 배후란 주장을 펼치고 있다. 배운 여자들의 촛불은 이제 방송국으로 모아지고 있다. 우리는 새로이 각성한 이 지혜롭고 공익적인 시민들과 어떤 연대를 하여야 할까? 우리의 고민은 이곳에 모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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