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베이징 올림픽과 함께 발발한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이 그루지야의 실질적인 패배로 마무리가 돼가고 있다. 그동안 그루지야의 후견을 자임해왔으면서도 의외로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미국이 뒤늦게 폴란드에 MD기지를 설치하고, 러시아의 WTO 가입을 저지할 뜻이 있음을 내비치며 러시아를 압박하고 나섰지만, 그루지야는 안으로는 남오세티아, 압하지아의 분리주의 세력과, 밖으로는 러시아와의 지루한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할 운명을 맞았다.

2004년, ‘장미혁명’을 이끌어 세바르드나제 대통령을 몰아내고 37세의 나이에 대통령에 오른 사카슈빌리는 당시 빈곤과 부패에 신음하는 구소련권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도해줄 민주투사 스타로 떠올랐다. 서방세계가 그를 제2의 바웬사나 하벨로 여겼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이전의 구소련의 지도자들과는 뿌리부터가 다른 신세대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컬럼비아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 경력에다 완벽한 영어구사력과 세련된 매너까지 갖춘 사카슈빌리는 미국식 가치를 유라시아대륙에 설파해줄 수 있는 이상적인 지도자로 여겨졌다. 실제로 뉴욕에 있을 때 그는 조지 소로스와도 친분이 깊었는데, 후에 조지 소로스 재단은 그루지야의 ‘장미혁명’ 과정에서 막대한 달러를 제공하고 인적, 사상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부터 시작된 이라크전쟁은 그루지야가 미국의 확실한 우방으로 떠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루지야는 이라크에 무려 2000명의 병력을 파견해(나라 전체의 군사가 4만이 채 안되는데!) 영국에 이은 최대 참전국이 됐다. 자신의 호불호 감정을 비교적 솔직하게 표현하는 부시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아름다운 청년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올해 초 야당의 반대시위와 부정선거 시비에도 불구하고 사카슈빌리가 재선에 성공하자 중동지역을 순방하는 와중에 짬을 내 직접 축하 전화를 걸었을 정도다.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에서 발발한 이른바 ‘색깔혁명’이 모두 구소련 블록에서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의 고리 Not-friendly ring’를 만들려는 미국의 음모라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루지야 같은 나라에서 러시아 대신 미국과 서방을 파트너로 삼으려는 사카슈빌리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실패한 국가’로 전락한 그루지야의 앞날을 기약하기 위해선 구소련의 잔재를 타파하고,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서구적 가치와 서방의 자본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데 대다수 그루지야인들이 동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루지야는 서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에는 서구와 멀리 떨어져 있고, 러시아의 그늘이 너무 짙은 나라다.

사회주의 붕괴 후 미국중심의 일방적 세계질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린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은 첨예한 지정학적 이해관계의 틈바구니에 놓인 그루지야 같은 나라가 혼란 속에서 국가의 안위를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 윤성도〈KBS 스페셜〉PD

그리고 그러한 나라의 지도자는 대외적으로는 극단적인 치우침을 경계해야 하며, 국민의 신뢰와 안정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부의 도움은 사상누각일 뿐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교훈을 일러주고 있다.
전임정권의 ‘퍼주기’와 한미동맹 약화를 비난하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쇠고기 파동, 남북관계의 경색, 독도문제 등의 문제로 국제무대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현 정부가 8월에 할 일이 워낙 많더라도 ‘제 2의 중동’이라 불리는 카프카스 지역에서 일어난 일들을 한번 꼼꼼하게 복기를 해봤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