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퇴보를 깨달은 순간 늦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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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퇴보를 깨달은 순간 늦은 것이다”
[인터뷰]KBS 스페셜 ‘언론과 권력,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 황응구 PD
  • 김고은 기자
  • 승인 2008.08.25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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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이자, 유명 축구단 AC밀란의 회장이며, 동시에 민영방송 ‘미디어세트’를 소유한 언론재벌. 30대에 건설 사업으로 일찌감치 부를 축적한 그는 성공 신화를 앞세워 지난 5월 세 번째 총리직에 올랐다.

총리가 된 이후, 베를루스코니가 가장 역점을 둔 일은 다름 아닌 공영방송 장악이었다. 최대 공영방송사 RAI(라이)의 이사회에 친정부 이사를 채워 넣은 다음, 이들을 통해 RAI 간부를 선출해 편집권을 침해하기 시작했다. 베를루스코니 한 마디에 RAI의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들도 목이 달아났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대륙 저편의 이탈리아에서 벌이지고 있는 일들이 대한민국의 상황과 놀랍도록 비슷하니 말이다. 공공연한 KBS 사장 사퇴 압력으로도 모자라서 이사회 구도를 순식간에 친여당 성향으로 역전시키고, 이른바 ‘대책회의’를 통해 KBS 사장 선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은 베를루스코니와 닮았다. 처음 “비행기로 13시간 떨어진 대륙의 한 ‘또라이’로, 특수성으로 비칠까 우려했다”는 황응구 PD의 말이 머쓱할 정도다.

▲ 'KBS스페셜-언론과 권력,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를 연출한 황응구 PD
지난 17일 방송된 〈KBS스페셜〉 ‘언론과 권력,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는 언론과 권력이 손잡을 때, 민주주의가 어떻게 위협받는가를 보여준 프로그램이다. 황응구 PD가 처음 기획에 들어간 것은 지난 5월. KBS 이사회 김금수 이사장이 사퇴하는 등 정연주 사장 사퇴 압박이 가시화되던 때였다.

“공영방송 지켜주세요”라고 호소만 하기엔 낯간지럽다고 여겼던 황 PD는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스스로도 “전혀 관심 없었다”는 이탈리아의 언론과 민주주의를 연구했다. 결과적으로 올림픽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시청률 약 6%를 기록했고, 많은 화제를 모았다. 황 PD는 “KBS에서 벌어진 이후의 상황들이 만들어낸 결과”라며 “역사가 만들어 준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방송을 본 〈조선일보〉는 19일 ‘KBS, 이탈리아 보고 뱉은 침이 제 얼굴에 떨어지다’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쓰레기 프로그램”이라는 등 험담을 쏟아냈다. 황 PD는 “덕분에 화제가 돼 고맙다”며 “주장하는 건 좋은데, 사실도 주장도 아닌 욕이었다. 사설을 그렇게 쓰면 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쓰레기’란 표현을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2주간 이탈리아 현지를 취재하면서 황 PD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RAI 관계자와 지식인들이 패배감과 무력감에 젖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언론의 가장 큰 의무인 비판, 감시기능이 거세당한 지식인과 언론인의 모습을 보며 공영방송에서 시사를 다루는 PD로서 우리가 상당히 진보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RAI의 위축된 모습은 역설적으로 슬펐다. “그들의 무력감은 나의 10년 후 모습과 겹쳐질 수 있다”는 게 황 PD의 말이다.

그는 “가장 큰 문제는 권력이 언론과, 언론이 권력과 한 몸이 되었을 때 민주주의는 100% 퇴보한다는 점”이라며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없으면 민주주의의 퇴보가 드러나 그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늦은 셈이 된다”고 강조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는 이탈리아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벌은 이미 내려졌다. 다시 회복할 수 없다”고.

▲ 'KBS스페셜-언론과 권력,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총리 베를루스코니는 방송사와 신문사, 출판사, 광고회사, 영화사, 축구단 등을 소유하고 있다. ⓒKBS
황 PD는 “KBS인들도 ‘배부른 돼지’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5년, 10년이 지나 상황을 깨달으면 늦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월급 많은 직장인에 만족하면 저널리스트가 아닌 기능인으로 남는다”며 “지금 분위기대로 가면 권력이 싫어하는 비판 프로그램은 없어질 거다. 우리가 저항하지 않고, 국민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얼마든지 없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KBS가 아직 늦지 않았다고 했다.

“정치적 독립과 제작 자율성을 위한 우리의 열망은 패배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이 정권을 택했고, 그 정권에 의해 이사회가 장악됐다. 이렇게 1~2년은 퇴보할 수 있겠지만 선배, 동료들과 건강한 후배들을 봤을 때 강건할 거다. 국민들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공영방송의 가치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그것을 정치권과 우리에게 요구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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