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김용진 기자에게 드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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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김용진 기자에게 드리는 글
[기고] 이정호 전 언론노조 정책국장
  • 이정호 전언론노조 정책국장
  • 승인 2008.09.23 2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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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배, 그냥 내려가진 마십시오.

제가 몇 달 전 KBS에 나돌던 ‘노무현정권 부역자 명단’의 정점에 김 선배도 있다는 얘기를 전했을 때도 피식 웃으며 “그런 게 있어?”라고 했지요. 지난 17일 밤 숙청인사에서 선배의 이름을 확인하고 저는 오히려 맘이 편했습니다. 낯선 서울에서 누가 알아주지도 않은 고생을 사서 할 필요없이 익숙한 부산에서 적당히 엔조이 하며 기자생활하면 그만이죠.

▲ 이정호 전 언론노조 정책국장
90년대 중반 제가 처음 부산 금정서로 경찰기자를 나갔을 때 무뚝뚝하게 앉아 있던 선배는 무척 차가웠습니다. 선배는 마우리도 잘 돌지 않는 경찰기자였는데, 어쩌다 형사계장 앞에 나타나면 그날로 경찰 몇 명의 목이 날아갔죠. 소리없이 나타나 전광석화처럼 치고 빠지는 김 선배의 전투력은 대단했죠. 명절때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받은 촌지를 다시 돌려주자고 한 것도 김 선배였고, 돌려주는 악역도 김 선배가 자청했죠.

그런 김 선배가 기자생활 시작한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KBS 기자라면 관료들이 “에이 같은 공무원끼리 좀 봐주쇼”(과거 KBS는 공보처 산하 하나의 국에 불과했던 서글픈 적도 있었다)라고 빌붙기 일쑤였습니다. 87년 6월 항쟁때 초량동에 있던 부산KBS총국은 시위대의 돌세례를 받기도 했죠. 그런 수모를 뒤로하고 겨우 공영방송 꼴을 갖춘 KBS가 21세기 대명천지에 ‘공영방송’과 ‘국영방송’도 구별 못하는 권력에 둘러쌓여 난도질 당하고 있습니다.

김 선배 보고 노무현 정권 부역자라뇨? KBS 안에 정권의 권력형 비리를 캐는 탐사보도팀을 만들고 키운 게 김 선배인데 ‘부역자’라니. 90년 서기원 등 총칼로 잡은 권력기 내내 낙하산 사장을 내려 보내고 그 밑에서 열심히 땡전 뉴스를 만들었던 지금 KBS 사장이 정권과 재벌기업의 커넥션을 캐려고 백방으로 뛴 사람보고 부역자라뇨. 지난해 여름 “그걸 못 쓰면 천추의 한이 될 것 같다”며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탐사보고 꺼리를 물고 늘어졌죠.

▲ 김용진 전 KBS 탐사보도팀장
그렇다고 김 선배가 어디 친 정연주입니까. 정 사장이 KBS사장 되던 과정을 다 알면서도 정 사장 사람일순 없었죠. 김대중 정권 때 박권상 KBS 사장과는 어땠습니까? 노보를 통해 하도 박 사장을 까다 보니 “김용진과 박권상은 한 하늘 아래에선 결코 살 수 없다”는 말까지 들었죠. 그 덕에 박 사장에게 징계 먹고 차장 진급도 늦었죠.

그렇다고 김 선배가 어디 꼴통 좌파입니까. 89년 이전의 조갑제를 두고 한국 최고의 탐사기자라고 정당하게 평가할 줄 아는 김 선배는 “조갑제는, 한국 언론으로선 크나큰 손실”이라고 했죠. 남의 기사를 설거지 하며 필명을 쌓았던 동아일보의 수많은 자칭 지사적 선배기자 보다, 일흔 넘어서도 현장을 뛰는 존 필저나 시모어 허쉬를 기준으로 삼자고 했죠. 그래서 노무현 정권 말기 미디어포커스팀장이 됐을 때도 기쁘지 않다고 했죠. 팀장이면 승진한 건데도. 그런 김 선배는 자기 스스로에게도 기자 일 수 있습니다.

김 선배는 언론사의 탐사보도팀을 ‘거대한 장치산업’이라고 했죠. 1년에 엄청난 예산을 쓰는 KBS가 인명 데이터 하나 없어 매번 중앙일보 것을 이용하는 게 게 말이 되냐고. 그 많은 인터뷰 자료화면조차 데이터 베이스화 하지 않고 몇 개월만 지나도 자료 하나 축적되지 않는 꼴을 가장 안타까워 했죠. 처음 KBS 탐사보도팀은 BBC의 <파노라마>팀을 모델로 했지만 ‘장치산업’을 완성하기엔 인력도 예산도 턱없이 부족했는데도 그렇게 짧은 기간에 놀랄만한 특종을 쏟아냈죠. 9시뉴스를 보다가 땀냄새가 좀 난다 싶으면 으레 김 선배의 탐사보도팀 작품이었죠.

KBS는 참 불행합니다. 80년 남짓한 KBS 역사에서 이제야 겨우 내부출신 사장을 얻었지만 그 사장이 여전히 청와대의 낙하산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김 선배, 만감이 교차하겠지만 그냥 순순히 부산으로 내려가진 마십시오.

2008년 9월 23일 / 후배 이정호

▲ 지난달 11일 KBS 본관 민주광장에서 열린 KBS사원행동 출범식에 모인 KBS 사원들 ⓒPD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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