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 눈] 민주주의에서 도망치는 도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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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영화 〈도망자〉에서 주인공은 추적하는 경찰들이 잡았다 싶은 순간에 또다시 빠져 나간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도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도망치듯 사라져 버리는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다고 민주주의 연구에 생애를 바친 최장집 선생은 전했다.

지금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민주적으로 실시된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는 이유가 모든 통치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양 행동하는 대통령과 측근들의 태도는 지난 정부와 비교해서도 탁월하다. 법과 절차를 무시한 공기업 임원들의 면직, 이에 이은 낙하산 인사, 그리고 합리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저지른 한미 쇠고기 협상까지. 이 정권이 지지율 20%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10년은 한국 언론, 특히 방송영역에 있어서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에 대해 권력이 직접적으로 통제를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저널리즘의 일반 원칙이 정립되는 시기였고, 그래서 민주주의는 조금씩이나마 발전할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방송사의 수장들은 적어도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훼손한다는 비판은 받지 않았다. 구성원들이 상업적 성과에만 골몰하는 공영방송의 수장들에 대해 비판의 칼을 들이대기는 했지만, 그들 스스로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정권이나 권력에 복종하려는 경향은 보이지 않았다. “민영방송이 공영방송보다 다루기 쉽다”라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떠들고 다니는 대통령의 형님이 방송계 최고 권력을 갖기 전에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KBS, MBC, 그리고 YTN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과연 이들 공영방송의 수장들이 과연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강한 의심을 가지게 한다. “특보”라는 이름으로 정치권을 기웃거리더니 이제와 YTN의 사장을 하겠다는데 인사와 또 그에 야합하는 언론인들, 야반도주하듯 한 밤에 절차와 정당성을 무시한 채 보복인사를 저지르는 KBS의 경영진들, 그리고 〈PD수첩〉에 대한 정권의 온갖 행패에 대해 굴욕적인 사과방송과 원칙 없는 인사 조치로 화답하는 MBC의 수장들을 보면서 의심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게 된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언론인이 아니라는, 오히려 민주주의에서 도망치려는 “도망자”에 다름 아니라는 확신이다.

필자가 속해있는 MBC 시사교양국은 지금 고사 직전의 위기에 처해있다. 9월 2일 방송의 날 기념 만찬을 대통령과 함께 한 MBC 사장은 3일 후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을 고발한  〈PD수첩〉의 실질적 책임을 지고 있는 시사교양국장을 전격 경질한다. 굴욕적인 사과방송, MC와 CP의 인사 조치에 이은 화룡점정으로서 담당 국장의 경질이었던 것.

▲ 김재영 MBC 시사교양국 PD

시사교양국 구성원의 강한 반발에 신임 국장은 사퇴를 표명했고, CP들 역시 보직 사퇴하였다. 시사교양국 창립 이래 가장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시사교양국 피디들은 정권의 비상식적인 공세에 대한 경영진의 태도가 도가 지나쳤다고 판단, 책임 있는 해명을 요구했지만, 여전히 답은 없다. 그리고 2주가 지났다. 그들은 도망자 마냥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고 있는 걸까. 도망자가 한 밤에 거처를 찾듯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까. 다만, 그래도 한 때의 선배로서 더 이상은 도망가지 말기를 바라면서도,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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