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아이콘, 기륭전자 노조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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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제작기] 〈PD수첩〉 ‘기륭투쟁 1127, 그 끝은 어디인가’

기륭전자 비정규직 문제가 생겨난 지 만 3년이 넘었고 4년째 답보 상태다. 그러는 사이 기륭의 노조원들은 비정규직 투쟁의 아이콘이 되었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최전선에 서있게 되었다.

투쟁 초반 약 200여명이었던 조합원의 수는 3년이 지난 지금 10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복되는 단식투쟁과 고공투쟁 등으로 이들의 몸은 더 야위었고,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주름은 얼굴 곳곳에 피어나고 있었다.

▲ 유성은 PD
하지만 오히려 그 3년이라는 시간 때문에 기륭의 문제는 이슈화가 되었던 시간만큼 또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이제 기륭은 케케묵은 이슈이며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난제에 불과하다. 그래서 오상광 PD와 나는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짚어보고 싶었다.

기륭의 노조원들에게 3년이란 시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생계를 위해 뛰어들었던 비정규직 노동이었다면 왜 이들은 3년 동안의 생계문제를 포기하고 길바닥에서 투쟁하고 있는가. 인간이 90여일이 넘게 단식을 하면서까지 관철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일까. 그들은 어떤 표정으로 그 컨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의문점들에 대한 답은 오래 전에 나와 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직접 그들을 만나서 듣고 싶었다.

지금도 처음 이들을 만나러 가던 이른 아침이 기억난다. 오전 7시 20분부터 시작되는 출근 투쟁을 카메라로 찍고 이들과 인사도 나누기 위해 시간에 맞춰 이른 아침 회사를 나섰다. 당연히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게 되었다. 컨테이너 앞에 간이 버너를 설치하고 직접 밥을 해먹는 모습, 오래된 단식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복식을 위해(노조원들 중 3분의 1이 약 두 달 전의 단식 때문에 복식을 하고 있었다.) 죽을 쑤는 모습, 그리고 그 앞에서 받아놓은 물로 겨우 설거지를 하는 모습 등.

하지만 가장 나에게 충격을 주었던 모습은 90일이 넘게 단식을 하고 있는 김소연 분회장 앞에서 온 노조원이 모여 계란 프라이니, 젓갈이니, 김이니, 멸치조림이니, 김치 등을 펼쳐놓고 아랑곳없이 아침을 먹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또랑또랑한 눈매로 놓치지 않고 ‘관찰’하던 김소연 분회장.

▲〈PD수첩〉 ‘기륭투쟁 1127, 그 끝은 어디인가’ 방송장면 ⓒMBC

게다가 아침 식사 내내 노조원들은 웃음을 잃지 않고 농이 오갔다. 그 고난의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얼굴은 3년 전의 그 모습보다도 더 어둡고 더 고뇌에 차 있고, 더 빛을 잃었겠지….라는 나의 생각은 성급한 오판이었다. 그들의 생활에도 여느 사람들의 그것처럼 웃음이 있고, 생기가 있었다. 그들에게 이미 투쟁은 너무나 익숙한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반증하듯 투쟁기간 중 2명의 조합원이 짝을 만나 결혼했으며, 한 조합원은 이제 다가오는 10월 결혼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생활이 되어버린 투쟁이지만 이들은 언제든 이 생활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10월 결혼을 앞둔 조합원은 제발 결혼 전 이 모든 문제의 끝을 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한다.

끝을 내기 위해서는 누구든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법도 이들 편은 아니다. 지금의 비정규직 보호법은 생산직의 경우 ‘위급한 경우’에 한하여 파견직의 3~6개월 근무를 허용한다. 그래서 파견직의 수명은 길어도 6개월이다. 이들에게 평생직장은 없다. 길어봤자 6개월의 근무를 끝으로 다른 직장으로 메뚜기 뛰듯 옮겨 다녀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파견직들은 본인이 노동을 제공하는 회사에 직접 고용된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해당 회사에 법적인 책임을 물을 권리가 전혀 없다. 지금 기륭노조가 봉착한 문제도 바로 그것이며 비정규직 문제의 가장 큰 핵심이다. ‘문자해고’라는 부당한 대우와 비정규직으로서 받았던 차별적 대우의 책임을 물을 주체가 애매해진 것이다.

이들이 투쟁을 그래도 계속하는 것은 희망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이들이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명예회복이나, 복직보다도 이 시대 이 땅의 젊은이, 대학생들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이제 비정규직이 아니면 직장을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가는 지금의 젊은이들이 이런 환경에서 어떤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지 걱정했다. 언제나 제자리일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인생, 봉급이 오르거나 좀 더 낳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조차도 앗아가는 비정규직 인생은 결국 우리시대의 ‘88만원 세대’이며,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디려는 젊은이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기륭 노조원들은 자신들의 어깨가 무겁다고 느꼈다. 취재했던 도중 한 조합원이 던진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한 번도 최저임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 아들, 지금 취업을 준비 중인 내 아들만은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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