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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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점에서
[이채훈 PD의 터닝포인트] 글 연재를 시작하며
  • 이채훈 MBC PD
  • 승인 2008.10.06 16: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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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정릉 청수장에는 버스 종점이 모여 있다. 종점 선술집은 내 단골집이다. 두부전 2,000원, 막걸리 한통 2,500원... 가끔 이 곳에서 식사와 술을 함께 해결한다. 30년전, 막걸리와 감자탕으로 저녁을 때우던 대학 시절과 똑같다. 불경기로 일거리가 없는 노무자들이 늘 모여서 떠든다. 마음 허한 가난뱅이들을 가슴에 품어 주는 선술집 아주머니는 우리 동네 부처님이다. 막걸리 한잔 노래 한잔 나누고, 즐거운 얘기 아픈 얘기 나누고, 사과 한 개 밤 한 톨 나누고…. 잃을 것 하나 없는 종점의 가난뱅이들은 그래서 넉넉하다. 부자들이 흉내 내지 못하는 여유가 있다.

PD 생활 25년, 종점을 향해 간다.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대학 후배들의 비아냥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방송사에 들어왔고, 거짓과 위선의 방송을 경험했다. 6월항쟁 이후 참회와 용서의 통과의례를 겪었고, 프로그램을 통해 속죄하려 했다. 누구나가 그러하듯, 나 또한 능력과 개성에 맞게 열심히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가능한 한 창조적으로 살려고 노력했고, 칭찬과 비판이라는 ‘소통’의 네트워크 속에서 힘겹게 헤엄쳐 왔다. 그러는 동안 방송은 우리 사회의 상식과 양심을 회복해야 하는 엄중한 책임을 짊어지게 됐다. 종점을 눈앞에 둔 PD니까 후배들에게 옛날 얘기를 좀 떠벌려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미래를 생각할 때 과거를 돌아보는 것, 과거에 발 딛고 미래로 걸어가는 것은 여전히 오늘의 지혜다.

▲ 지난 8월 18일 열린 ‘방송장악 저지 및 PD수첩 사수를 위한 조합원 비상총회’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우리 사회가 종점에 와 있다. 위험사회, 비정규직 800만, 자영업자의 1/3이 파산하는 시대. 5%의 안전을 위해 95%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상위 5%의 발밑에 있는 서민들의 생계가 무너진다면 소수의 특권층인들 안전할 수 있을까? 미국 경제의 거품이 무너지자 지구촌 전체가 출렁인다. 그 소리는 지옥의 묵시록, 그 나팔소리처럼 불길하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는 갈 데까지 갔다. 안심하고 먹을 음식이 없다. 가족이 파괴되고 도덕이 무너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도 자본을 닮아 간다고 했던가? “너 죽고 나 살자”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논리가 판치고 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건설 재벌의 ‘파렴치’가 지배 세력의 도덕으로 자리잡은 지금, 자칫 ‘파렴치’가 모든 이들의 상식이 될까 심히 우려된다.

종점,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 그들의 언론장악 시도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조차 못 느낀다. 관영방송과 공영방송도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방송을 자기 홍보수단으로 삼는다고 그게 뜻대로 되겠는가? 국가보안법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정권의 맘에 안 들면 누구든 ‘적을 이롭게 한다’며 처벌할 수 있는 법 아닌가. 한술 더 떠 유모차 아줌마들을 ‘아동학대’로 처벌한단다. 정권에게 그토록 거슬렸던 촛불의 씨를 말리기 위해 어떤 법이라도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이 또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6월 항쟁 이후 20년 동안 일궈온 민주주의의 열매를 백지화하는 짓이다. 그들이 입만 열면 얘기하는 ‘법치주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처사다. 저항해야 한다. 20년 전, 민주화의 큰 흐름에 무임승차했다고 부끄러워한 우리들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국민들에게 빚을 완전히 갚을 기회가 온 것 아닌가?

▲ MBC 이채훈 PD ⓒMBC
종점은 시발점이기도 하다. 새벽에는 모든 버스들이 기지개를 켜고 새롭게 출발한다. 어둠을 헤치고 출발하는 버스는 아직 가난뱅이들의 시름이 가득하다. 나는 우리 PD들이 앞장서서 세상에 아침 햇살을 실어 날라야 한다고 믿는다. 사랑, 자유, 진실, 정의, 소통, 평화, 공존. 거창한 단어들인가? 아니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프로그램에 녹아 있어야 하고, 어느덧 온 국민의 일상 속에 살아 숨 쉬어야 할 작은 단어들이다. 몰상식과 파렴치의 탁류를 압도하고 상식과 존중의 따뜻한 큰 물길을 여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혁명이다. 누가 이 혁명을 위한 탄환이 되어야 하겠는가? 바로 우리 PD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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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아빠 2008-10-06 23:24:38
우리일상의 많은 부분들을 이미지로 그려내는 피디들이야말로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의 소리를 더 넒고 깊게 들어야겠지요. 어떻게 더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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