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엔 BBC만 있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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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엔 BBC만 있는게 아니다
[글로벌] 악어와 악어새, 황색미디어와 파파라치
  • 영국=장정훈 통신원
  • 승인 2008.10.13 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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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미디어의 정글이다. 크고 작은 수많은 모양의 미디어가 정글속의 종(種) 처럼 존재한다. 방송은 물론이고 신문, 잡지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세계 최고의 방송 권위지부터 <더 썬> 같은 황색신문과 <더 썬>의 위상을 위협하는 더 한심한(?) 신문, 잡지까지 그 색깔도 다양하다. 영국 사람들이 그만큼 다양한 생각과 관심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도 되겠다.

그런데 속칭 황색 미디어라고 하는 방송, 신문, 잡지는 뭘로 먹고살까? 주로 정치, 스포츠, 연예계를 아우르는 유명인사 이야기다. (유명 인사들은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와 공생한다. 시사, 스포츠, 연예 잡지는 기본이고, 다이어트와 패션에 이르기까지 유명인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매체는 없다.) 혹자는 “그게 어디 공생이냐 황색미디어가 일방적으로 기생하는거지”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겠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황색미디어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 대 놓고 하면 안 된다. 그럼 바로 반론 들어온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파파라치. 황색미디어들과 가장 가까운 협업자들이다. 황색미디어와 떼어놓을 수 없다. 한때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의 종군기자로 활약하다가 어느 순간 회의를 느끼고 90도쯤 방향을 틀어 파파라치 전문 회사를 차린 사람이 있으니 바로 대런 라이온스다. 파파라치들에게 유명인의 동선을 제공해 주고, 그들의 사진을 팔아주는 비즈니스로 크게 성공한 그는 지금 파파라치계의 대부로 불리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명인들은 좋든 싫든 파파라치들로 인해 유명세를 타고, 많은 것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겁니다. 유명인들에게 사생활은 없습니다. 파파라치가 싫고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으면 이 바닥를 떠나면 됩니다. 간단한 거죠.”

그들의 카메라가 아름다운 장면을 비추든, 추한 장면을 비추든 그 사진 한 장에 대중은 주목할 것이고, 정치인이든, 스포츠 선수든, 연예인이든 모든 유명인들은 존재의 목적을 유지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파파라치들은 영국 미디어 산업의 구조로 보면 가장 낮은 곳에서, 제작전선에서 보면 가장 최전방에서 일하는 미디어 노동자들이다. 그런 사람들도 미디어 종사자 혹은 노동자로 인정해 줘야 하느냐고 불쾌해 하는 분들도 있겠다. 긴말 하지 않겠다. 그냥 <오마이뉴스>에 접속해 보시라. 파파라치도 세금내고 사는 시민들이다. 모든 시민을 기자로 간주하는 오마이 뉴스적 시각에서 보면 그들도 미디어 종사자들임에 분명하다.

물론 그들이 생산해 내는 상품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흔히 생각하듯 파파라치들이 특별히 황색 미디어만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다. 미디어 산업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충실한 산업이다. 어느 매체에서건 그들이 생산한 뉴스와 그림을 원하면 그들은 판다. 정통지로 분류되는 미디어 중에도 이들의 ‘꺼리’를 사주는 매체는 꽤 된다.

가장 큰 유명인 전문 잡지 헬로(Hello)나 오케이(OK)는 제법 점잖은 축에 속한다. 히트(Heat)나, 주(Zoo), 넛츠(Nuts) 같은 잡지들은 유명인들의 침실까지 들추어 보이는 적나라함을 보인다. 시청자들이나 독자들이 유명인들의 은밀하고, 추한 모습을 낱낱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파파라치들의 노고(?)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파파라치들은 대여섯 시간씩 유명인의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볼일이 급해도 참고, 배가 고프면 미리 준비한 샌드위치로 때우면서 유명인이 나타날 듯한 곳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스틸카메라에 동영상카메라를 부착해 1석 2조를 노리고, 휴대폰도 카메라 성능이 좋은 것으로 가지고 다닌다. 위장은 기본이고, 연인과의 밀회장면을 포착하기위해 낮은 포복으로 대담한 침투를 시도하기도 한다. 2일 1조가 되어 차량이나 오토바이로 일대 추격전을 벌이기도 한다. 그렇게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들에 대해 유명인사들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가끔 말썽이 일기도 하고, 법정에 서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해한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 말이다.

▲ 런던=장정훈 통신원/ KBNe-UK 대표
파파라치는 모두 프리랜서다. 자격조건도, 갖춰야할 기술도 없다. 인내심과 민첩성만 갖추고 있으면 나머지는 요즘 성능 좋은 카메라가 알아서 다 해준다. 그리고 돈은 판매를 대행해주는 회사나 개인을 통해 팔리는 만큼 받는다. 그래서 수입은 늘 들쭉날쭉한다. 그래도 꾸준히 활동을 하는 파파라치는 월 400만원 정도의 수입을 벌어들인다. 운이 좋아 대박이 터지면 부르는게 값이다. ‘대박사진’은 바로 파파라치들이 쫓는 꿈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황색미디어와 파파라치들은 명예훼손이나 사생활 침해가 직업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경찰서를 내집처럼 드나들어야 정상 아닌가? 유명인들은 사회적인 지탄을 받거나 인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받고 해외로 이민을 떠나네, 자살을 하네 해야 정상 아닌가? 영국의 유명인들은 참으로 무던한가 보다. 온갖 추문이 쏟아져도 “법정에서 봅시다” 하거나 “고인이 되셨습니다”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말이다. 영국이 이상한건지, 한국이 이상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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