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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김기슭 SBS 편성기획팀 PD

탁자위에 라면 반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옆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국물로 바닥을 살짝 가리고 있는 냄비가 방금 허기를 달랬음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라면은 왜 반개만 드셨어요?” “한 개 다 해서 세 끼 먹으면 돈 많이 드니까.” “출출하시잖아요?” “좀 오래 단련되어서 그런대로 견딜 만합니다. 물을 많이 부어 끓이면 배도 부르고….”

마포의 한 빌딩 지하 보일러실이었습니다. 함씨는 IMF로 다니던 공기업에서 명예퇴직을 당했고, 그 퇴직금을 평소 자신이 존경하던 김우중 회장과 신문기사를 믿고 대우에 투자했다가 휴지조각만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김우중씨는 라면 이렇게 안 끓여 먹을 거 아닙니까?” 사면을 받기 전 김회장이 세브란스병원 병실에서 투병(?)을 하고 있던 무렵이었습니다.

한 평 반짜리 고시원방에서 하루의 노동으로 지쳐 쓰러져 자고 있던 김씨에게 화마가 덮쳤습니다. 김씨네는 카드빚 덕택에 헤어져야만 살 수 있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시골에서 할머니와, 엄마 아빠는 각기 돈벌이를 찾아 서울 여기저기로 흩어져 지냈습니다. 희망은 함께 살 근교의 월셋방을 허락하는 듯했고, 그것이 그리 멀지 않을 무렵 재앙이 찾아왔습니다. 헤어져도… 살지 못 했습니다.

2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함씨가 먹던 라면 값은 680원에서 750원이 되었습니다. 라면 반개를 먹던 함씨는 한 끼니 340원에서 375원으로 10.2941%를 더 부담하거나, 6.176g을 덜 먹어야 합니다. 정부에선 라면을 포함한 생필품 50개를 선정해 직접 챙기겠다합니다. 라면의 부가세를 환급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 동안 영수증을 챙겨 두지 않아 돌려받긴 힘들겠습니다. 검토중, 검토중… 시행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그 사이 전국의 미분양 아파트도 20만 호 가까이 되었습니다. 아파트는 남아돈다는데 김씨 유가족이 분양가를 감당하는 건 여전히 언감생심이고, 정부에서 일부를 매입해 임대를 준다 하지만 이 역시 별따깁니다. 그래도 모자라니 몇 년 안에 100만호를 더 짓겠다고 합니다. 적어도 변두리 논밭 한 가운데는 아니길 기대합니다.

물론 이들이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가난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 언뜻 이들이 먼저 생각나는 것은,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믿고 투자했다가 당한 함씨와 마구 나눠주던 카드를 받아 쓴 후 갚지 못 한 김씨 개인의 탓만은 아닌 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라면 값과 방 한 칸이 절실하던 시점 이전에 더 절실하고도 중요한 것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들을 라면 값과 방 한 칸에 천착하게 만들진 않았습니까, 이들이 허기를 때울 라면 값 70원 오른 것만으로 경제를 원망하겠습니까?

▲ 김기슭 SBS 편성기획팀 PD
그런데, 기업인들이 실적을 부풀려 투자자를 속이고, 회삿돈을 빼돌리거나, 분양가 높여서 마구 지어대다 회사가 쓰러져도, 심지어 야간에 특수 폭행을 해도 공헌이며 고용창출 하면서 유예, 사면으로 빠져 나가고 정책의 지원까지 받는 것이 시장원리인가 봅니다. 서민경제란 그저 라면 값 곱하기 수천 만 개로 반영되는 물가지수, 임대주택 건설 혹은 뉴타운 예정지역 수십만 호(戶)수 안의 수치로만 존재하나 봅니다. 박제된 서민경제 속에서 라면 한 개와 방 한 칸 너머의 상식과 (경제)정의와 복지의 실천이 허기집니다. 모두가 숨 쉬는 공기의 합(合)만큼이나 말입니다. 하지만 매 끼니 375원을 아끼고 방 한 칸 마련 못하는 이들에게도 계속 허리띠를 조여매고 더 열심히 일하자는 목소리만 더 잉잉거립니다. 바람이 차니 겨울이 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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