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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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배워라!
[이채훈PD의 터닝포인트]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 이채훈 MBC PD
  • 승인 2008.10.18 09:3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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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강원대 학생 2명이 성조기를 불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학살의 배후도 미국이요, 전두환 군부독재의 배후도 미국임을 알리려는 몸부림이었다. 두 학생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같은 해, 그레고리 존슨이라는 미국의 모택동주의자가 공화당 전당대회장 밖에서 성조기를 불 지르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인들은 격노했고 텍사스 주법원은 유죄를 선고했다. 이 분위기에 편승해 공화당 의원들은 ‘성조기 모독죄’를 신설하려 했다(초근 한국에서 거론되는 ‘사이버 모독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원심을 뒤집고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성조기를 불 지른 것은 남에게 물리적 상해를 끼치지 않았고 미국 체제를 위협한 것도 아닌, 단순한 ‘상징적 표현’이라는 게 무죄 이유였다.

“화난다는 이유로 사람을 처벌하면 되는가”

2002년 미국에서 이 케이스를 취재하던 중 저명한 법철학자인 마이클 헤이만 교수를 인터뷰했다. “한국과 미국의 이 대조적인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대놓고 물어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껄껄 웃었다. 답변 요지는 간단했다. “화나게 하려고 성조기를 불 지른 것 아닌가? 자기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화를 안 낸다면 뭐 하러 불 질렀겠는가? 그러나 화난다는 이유로 사람을 처벌하면 안 되는 것이다.” 
 

▲ <한겨레> 10월14일자 8면
최근 유모차부대, 광고 불매운동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고 국가보안법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국가보안법은 “북괴를 이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도”라는 주술만 붙이면 누구든 처벌할 수 있는 ‘이현령비현령’ 법이다. 그러나 이 법에 의해 수사 받은 오세철 교수와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북측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다. 단지 촛불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렸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유모차부대에 아동학대죄를 적용하려 한 발상도, 정당한 소비자 운동인 광고 불매운동에 업무방해죄를 적용한 것도 마찬가지다. 정권의 맘에 안 들면 어떤 법을 갖다 대서라도 처벌하겠다는 것으로, 모두 ‘이현령비현령’이다. 

일각에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자”는 말도 나온다. 그럴 만한 상황이다.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자유가 무참히 유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학교는 촛불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반성문을 쓰도록 했다. 쓰고 싶지 않은 얘기를 쓰게 한 이 행위는 글자 그대로 학생들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게 분명하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는 ‘자기 양심에 반하는 말을 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흠, 아동학대죄로 고발할까?)

그러나 정확히 말해 지금 위협받고 있는 것은 ‘말할 자유’다. 개인의 ‘말할’ 자유, 언론 ․ 출판 ․ 집회 ․ 시위 ․ 예술 표현의 자유를 두루 포괄하는 ‘표현의 자유’다. 엄밀히 말해 ‘사상과 양심의 자유’라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너무나 당연한 개인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 어떤 이념이나 신념이 있든 남이 알 바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엔 이에 해당하는 말조차 없다. ‘표현의 자유’(freedon of speech)라는 말 하나 뿐이다.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도 한번 주목하길 

▲ <경향신문> 10월14일자 10면
이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미국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1977년 시카고 근교의 스코키 유태인 마을 앞에서 미국 나치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유태계 주민들은 나치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조치를 법원에 요구했다. 일리노이 지방법원은 “스코키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 네오나치의 집회를 금지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네오나치는 즉각 연방대법원에 항소했다. 미국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이 재판에서, 연방대법원은 1978년 1월 27일 ‘네오나치 승소’라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나치 마크를 앞세운 시위는 상징적 발언으로, 수정헌법 1조가 보호하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사전 제약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미국의 지식인, 종교인, 인권운동가를 비롯한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스코키를 위해 반나치즘 시위로 맞대응을 한 것이다. 기가 죽은 네오나치는 다시는 스코키에 들어오지 못했다. 나치의 광풍에서 시민 사회를 지켜낸 양심과 상식의 통쾌한 승리였던 것.

극좌 모택동주의자의 ‘성조기 소각사건’, 극우 나치들의 유태인 마을 집회 사건, 이념적으로 대조적인 인물들이 일으킨 두 사건에서 미국 대법원은 모두 ‘표현의 자유’ 손을 들어 주었다.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면 미국인이 가장 자랑스레 지켜온 민주주의가 후퇴할 것”이라는신념을 보여준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이 나라의 지도층은 배울 생각이 전혀 없는 걸까?

〈PD수첩〉에 항의하는 뉴라이트 집회에서 ‘MBC는 김정일 방송’이란 구호가 나왔고, 인공기를 MBC 깃발로 묘사한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냥 “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 하는구나” 하며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이들은 엄기영 MBC 사장 자택 앞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MBC는 이들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지 않았다. 그러니 촛불 집회가 맘에 안 든다고 오만가지 법을 들먹이며 여러 사람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친북 세력’이란 말이 다시 등장했다. 지난 10년 동안 ‘친북 세력’이 우리 사회에서 거의 사라진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북의 실상을 직접 알게 됐기 때문이다. 폭넓은 협력과 교류가 이뤄졌기 때문에 북을 신비화하는 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아직도 북측 정권을 동경하는 세력이 남쪽에 있다면 약간 이상한 매니아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반대로, 순수하게 민족화해를 추구하는 사람을 ‘친북 세력’으로 매도한다면 그건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북을 적대시하며 ‘친북 세력’의 주술을 외는 것은 공안정국으로 촛불을 영원히 잠재우려는 술수일 뿐이다. ‘친북 세력’을 잠재우는 최상의 방법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이 없는 한’ 그냥 두는 것이 정답이다.

다시 등장한 단어 ‘친북 세력’ 그리고 표현의 자유

▲ MBC 이채훈 PD ⓒMBC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21세기에도 외쳐야 하는 이 황폐한 한국. 건국 아버지들이 약속한 수정헌법 1조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소중히 지켜 온 미국. 두 나라를 평면에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집권층이 60년전 건국 당시와 별로 다를 것 없이 색깔론으로 국민을 탄압하는 이 한심한 상황은 최소한 극복해야 한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 같은 당연한 얘기는 정말 그만 하고 싶다.

최근 〈PD수첩〉의 클로징에서 나온 볼떼르의 모토. “나는 당신과 의견이 다르다. 하지만 당신의 견해가 억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기. 나는 이명박 정부의 공안정치를 주도하는 사람들과 의견이 다르다. 그렇다고 이 정부의 공안 통치를 옹호하기 위해 싸워야 할까? 아니다. 그들과 대항해서 싸우는 게 옳다. 그들은 국민의 ‘표현의 자유’, 그 뿌리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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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근 2008-10-18 20:28:42
기자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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