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에 대하여
상태바
도둑에 대하여
[이채훈PD의 터닝포인트]쌀 직불금 파문을 보며
  • 이채훈 MBC PD
  • 승인 2008.10.21 13: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MBC 이채훈PD ⓒMBC
#1. 가난한 이웃

IMF 직후, 아기 분유값이 없어서 고철을 훔친 남자가 있었다. 구멍가게 같은 봉제공장이 불경기로 문을 닫는 바람에 생계가 막막해졌다. 배운 게 없어 새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다. 부부가 한두끼 굶는 것은 그나마 견딜 수 있었지만 돌이 채 안 된 아기가 배고프다고 울 때는 마음이 찢어졌다. 고물상 앞을 지나던 그는 분유값을 마련할 수 있다는 유혹을 못 이겨 남의 고철에 손을 대고 말았다. 인터뷰 내내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럽게 울었다.

그는 도둑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이웃일 뿐이다. 방송이 나간 뒤 그는 다시 일자리를 얻었고, 아기 분유값을 벌 수 있었다. 우리집 꼬마들이 쓰다 남은 장난감을 갖다 주었다. 아기는 어느 부잣집 아이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그가 다시 남의 고철에 손을 대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럽게 울던 그 순간, 그의 죄는 이미 용서받았다.   
 
#2. 좀도둑

IMF 직후 좀도둑이 극성을 부렸다. 섭외 안 한 채 한 동네를 뒤졌는데, 도둑맞은 집을 반나절에 열 군데 이상 찾을 수 있었다. 미국발 금융 위기가 전세계를 뒤흔드는 지금, 약소국의 빈민층에게 제일 먼저 피해가 돌아오리라는 ILO의 보고서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생계형 도둑이 다시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함. 또는 그런 사람.” 국어사전에 나오는 ‘도둑’의 정의이다. 도둑질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보통 도둑이라고 부른다. 경찰이 잡는 도둑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평범한 도둑은 잘못을 뉘우치고 죄과를 치르고 다시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있다. ‘솔직한’ 도둑이기 때문이다. 

▲ <경향신문> 10월21일자 5면
#3. 날도둑

죄질이 나쁜 도둑, 즉 악랄한 도둑을 ‘날도둑’이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쌀 직불금을 받은 공무원과 국회의원, 언론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쌀농사 짓다가 적자 본 농민들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보전해 주자는 돈 아닌가. 이들이 돈을 타 가는 바람에 정작 농민들이 받을 걸 못 받았으니 명백한 도둑질이다. 투기 목적으로 농지를 소유할 정도의 부자가 가난뱅이 농민 돈을 빼앗은 셈이니 악랄하기 그지없다. 농민들의 절망과 피울음에 이들은 관심이 없다. 쌀 직불금 받아서 양도소득세 감면받고 농지처분강제금 면제받으니 두 손에 돈이 가득하다. 한 손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빼앗은 돈이고 다른 손은 탈세로 남긴 돈이다. 80년대 유행했던 <놀부가>의 한 대목이 절로 떠오른다.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가난뱅이 등치고, 애비 없는 아이는 주먹으로 때리고...♬”

이들의 죄질이 나쁜 가장 큰 이유는 평범한 도둑과 달리 좀체로 자신이 도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70년대 김지하가 질타한 <오적>들이 결코 도둑임을 자백하지 않았듯, 요즘 장차관, 국회의원도 좀체 뉘우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인 ‘노블레스 오블리제’ - “힘 있는 자가 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서구의 상식 - 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무리들이다. 이들을 비판하면 여당의 대표라는 자가 나서서 “마녀사냥을 하지 말라”고 엄호 사격을 해 대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들 중 463명의 언론인이 포함되어 있다니 참담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도둑을 감시하고 경고해야 할 사람들이 망 봐주다가 슬그머니 도둑질에 동참한 꼴이다. 

#4. 모두 도둑놈이 됩시다(?)

“민나 도로보데쓰!”(모두 도둑놈입니다!) 80년대 방송된 드라마 <거부실록>(고석만 연출)에 나오는 공주 갑부 김갑순의 대사다. 일제 때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돈을 모은 김갑순이 자기변명 삼아 입에 달고 다닌 말이다. 모두 도둑놈인 세상, 내가 도둑질 좀 했기로서니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걸 보니 날도둑의 역사는 참 길기도 하다. 위엣것이 도둑놈이니 평범한 사람들이 도둑질 좀 했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조차 없는 세상, 지금이 오히려 더 심하다. 도둑질 해 놓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면 의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모두 함께 도둑놈이 되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쌀 직불금을 변칙으로 신청한 사람들이 올해 급증한 걸 볼 때, 남도 하니까 아무 죄의식 없이 도둑질에 동참한 사람이 늘어난 게 분명하다. 더 늦기 전에 도둑은 잡아서 벌해야 하고, 훔친 돈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일이다. 그래야 이 나라의 양심이 살아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