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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 PD의 터닝포인트]

▲ MBC 이채훈PD ⓒMBC
“그리 먼 옛날이 아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시절..” 시인 신동엽의 <금강> 머릿글의 한 대목이다. 4.19혁명에서 3.1운동을 거쳐 동학혁명으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녹두장군과 파랑새, 어렸을 적 황토 마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발견하는 시인의 역사의식이다.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준 옛날이야기는 재미있었다. 역사가 별 건가? 옛날이야기로되 논픽션일 뿐이다. 조금만 집중하면 얼마든지 재미있다. “과거에서 현재를 배우고 미래의 지혜를 얻는다”는 엄숙한 목적 없이 그냥 재미있게 배울 수 있다. 아버지 젊을 때 얘기고 할아버지 어릴 적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역사가 재미없단다.

얼마 전 아침방송에서 초등학생 대상으로 실시한 역사 설문조사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6.25를 누가 일으켰냐”는 질문에 35%가 “남한”이라고 답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6.25를 남쪽이 일으켰다”고 방송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아무리 ‘좌편향 교과서’라 해도 설마 그런 내용이 실려 있을 리가 없는데? 어떤 아이들은 심지어 중국, 일본이 6.25를 일으켰다고 했다. 6.25가 일어난 시대를 모르는 아이들은 물론, 광복절, 개천절, 제헌절이 며칠인지, 무슨 날인지 모르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 <경향신문> 10월21일자 10면
이유를 묻자 “지루해요”, “관심 없어요”, “외우기만 해요”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사실, 이러한 징후는 오래 전부터 우려를 낳아 왔다. 대학생 중 상당수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잘 모른다. 방송작가 지망생 중 “8.15, 6.25, 4.19, 5.16, 5.18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시오”라는 문제를 푼 사람이 절반도 안 되는 걸 보고 놀란 일도 있다.

젊은 세대의 무지를 탓해서는 안 된다. 교육자든 언론인이든 기성세대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다.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일자리 찾기 위해 영어, 수학에 집중하도록 강제하는 교육 현실의 문제점은 오래 전부터 지적돼 왔다. 역사 공부에 흥미를 갖게끔 유도하는 교육적 장치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이유는, 인간이란 반복해서 가르쳐주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직접 겪은 일도 잊어버리는데 하물며 자기 태어나기 전의 일을 어떻게 스스로 기억하겠는가? 누군가 쉼 없이 얘기해 줘야 한다. 하긴, 기성 세대라고 젊은 층보다 역사를 더 잘 안다고 볼 수도 없다. 오래 산 만큼 더 많이 알겠지만, 왜곡된 역사관에 오염됐을 개연성은 더 높으니까.

젊은 세대는 상대적으로 지식이 부족하지만, 그 만큼 순수하기 때문에 새로운 주장을 쉽게 흡수한다. 역사에 대한 젊은 세대의 무지와 무관심은 그래서 위험하다. 정파적 이익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려는 세력에게 편리한 토양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뉴라이트, 국방부, 교육인적자원부에 이어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역사 교과서 개편을 주장하고 있다. “국가 정체성 차원에서 잘못된 것은 정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사회주의가 정통성이 있는 것 같이 돼 있는 교과서가 있는데 그것을 바로잡고 바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낮은 투표율을 악용해 선거에서 득을 보는 세력이 있듯, 이들은 역사에 대한 젊은 세대의 무지와 무관심에 편승하여 역사를 맘대로 재단하려는 유혹을 느낄지도 모른다. 몇 년 전 ‘50대와 20대의 연대’를 주장한 조갑제의 발상과도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뉴라이트와 정부, 한나라당, 교육감, 심지어 대통령까지 나서서 ‘좌편향’의 교과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열을 올리고 있다. 열린 토론으로 해결하면 좋으련만 늘 하던 식으로 윽박지르며 밀어붙일 태세다.

PD들은 이 혼탁한 논쟁에 뛰어들기보다 찬찬히 방송을 돌아보는 게 옳지 않을까? 아이들이 역사를 재미있게 여기도록 도와주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없을까? 생존경쟁의 한국 사회, 그 축소판인 학교에서 단시일에 좋은 대안이 나오기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방송이 앞장서는 건 어떨까? 교과서보다 재미있고 선생님보다 친근한 역사 프로그램이 절실하다. 꼭 엄숙한 교양, 다큐멘터리일 필요는 없다. 퀴즈도 좋고 연예 프로그램도 좋고 드라마도 좋다. PD들의 적극적인 태도가 절실하다. 교과서 다음으로 공식적인 매체라 할 수 있는 방송의 책임이 새삼 막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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