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인권] ‘모를 수 있는 권리’도 존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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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 중학교에서 미디어교육을 할 때의 일입니다. 평소 미디어교육 내용에 긍정적인 관심을 보여주시던 선생님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 해는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무장단체에 의해서 납치 살해된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을 때였는데, 그 학교 아이들이 인터넷에 떠돌던 그의 살해동영상을 쉬는 시간에 교실에 설치된 대형 TV를 통해 함께 본 일로 온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반이 아니라 여러 반에서 그 동영상을 보았고 학생들은 그 장면에 충격을 받아 울기도 하고 몇몇 여학생들은 화장실로 뛰어가 구토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체계적인 미디어교육이 필요하다

이 일로 모두 큰 충격에 빠졌지만 학교는 빨리 그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학생들을 호되게 나무라는 것으로 이 사태를 정리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단지 보지 말라고 야단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고, 본인도 그런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하소연 하더군요. 그래서 평소 제 수업에서 미디어 이해와 여러 가지 내용을 보며 함께 생각을 나누는 것을 알고 조언을 구하고 싶어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겪었을 당황스러움과 고통이 전해와 저절로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다음 수업시간에 우리가 가까운 친지의 초상집에 갈 때 검은색 정장을 입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가족을 잃은 이웃의 아픔에 함께 한다는 의미의 검은 옷 착용은 훌륭한 상가방문 예절이라며 위로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라도 경의를 표하는 이유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피해자를 위해 아직 어리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보자고 했을 때 아이들의 얼굴이 진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나친 호기심을 절제하는 것도 이웃사랑의 한 표현이고 예의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아이들과 함께 역지사지의 의미를 미디어의 사회적 책임감에 더해 나누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알고 싶지 않은 권리도 존중해주길

최근 한 여배우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공중파의 뉴스마저 온 국민의 눈과 귀를 붙들고 그 가족과 친구의 아픔조차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알고 싶지 않아도, 듣고 싶지 않아도 안 들을 권리조차 인정하지 않는 우리 언론을 보며 화가 나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에도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그녀가 웃으며 열심히 살겠다고 씩씩하게 자신의 이야길 들려주는 인터뷰를 하고 있었습니다.

▲ 최성주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

정말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에 이제 제발 그녀를 보내주라고, 쉬게 해주자고 호소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내 가족이라면, 내 친구라면 어떻게 할지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이고 예의인지 생각해주길 청합니다. 우리 모두가 내 호기심만 만족시키면 그만인 몰염치가 되지 않게 도와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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