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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위기론 진단(1)] 이은규 한국TV드라마PD협회장

최근 방송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드라마 위기론과 관련해 이은규 한국TV드라마 PD협회장이 <PD저널>에 글을 보내왔습니다. <PD저널>은 5회에 걸쳐 이 회장의 글을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드라마 위기론이 나오게 된 배경과 역사를 짚어보고, 현 단계에서 어떤 대안을 고민하고 모색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들어가는 말

비정상도 너무 오래 묵인하면 정상처럼 보입니다. 드라마 판이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비정상이 오래도록 지속돼 온 드라마 판, 이제 눈을 씻고, 정신을 차려서 한번 들여다봅시다. 드라마를 이용해 비즈니즈 하시거나, 드라마 계속 잘나가야 살 수 있는 분 꼭 한번, 함께 생각해 봅시다!

드라마가 뭐기에

죄송하지만, 필자의 개인 이야기로 시작해 보지요. 70년대 초,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을 때인데 옆집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흑백텔레비전을 구경 했습니다. 월남에서 베트콩과 싸우는 친구 형이 사 보낸 텔레비전이어서 인기가 대단했지요. 드라마였는데 산동네 이야기더군요. 고등학교 다니는 딸년과 아버지의 갈등이 한참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앞뒤 이야기도 모른 채 보고 있자니 딸의 이야기인 즉슨, “아버지가 싫다, 어쩌고저쩌고 이래서 싫고, 어쩌고저쩌고 저래서 싫고 ….”

딸의 투정이 계속되는 동안 알 수 있었던 건 대학 갈 돈도 없고, 엄마도 없고, 아버지의 일방적인 행동을 딸이 무척이나 불만스러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밥숟갈을 던져버린 딸의 불만을 묵묵히 듣고 있었습니다. 딸은 불만의 정점에서 아버지에게 비수를 꽂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하는 그 천한 일이(화장실을 처리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싫고 창피해!” 지금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아버지가 그 말에 눈을 들어 딸을 쳐다봤습니다. 연기자는 아마도 신구씨가 아니었을까 싶었는데요. 그 눈을 카메라가 가까이 들여다봅니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그리고 비애가 그 눈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단호히 일갈하십니다. ‘네가 정 그렇다면 부녀의 연을 끊자, 떠나라,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는 딸은 딸이 아니다.’ 그리고 일어나 툇마루에 나와 통일화를 신습니다. 일을 나가는가 봅니다. 참 고요하고도 단호한 행동이었습니다. 다 신고 하늘을 한번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그 형언하기 어려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눈을 카메라가 다시 한 번 보여줍니다.

이야기가 장황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그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고요한 행동에 이상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얼마 후에 텔레비전을 사준 그 형은 백골이 되어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감정들이 아우러져 드라마 PD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원일기>로 입봉을 했을 때나, 처음 자신의 기획으로 <걸어서 하늘까지>를 연출했을 때나, 그때 본 드라마의 첫인상을 마음구석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끄럽게도 아직 제가 받은 그런 느낌을 누구 한사람에게라도 주었는지 확신은 없습니다만,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드라마의 사랑은 사람들에게 마다 그 사랑의 이유가 다채로울 것입니다.

▲ SBS 드라마 〈타짜〉ⓒSBS
요즈음 경기가 많이 나쁘다 보니 자살하는 사람이 많이 느는듯합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자살을 결심한 불행한 가장이 쳐진 어깨와 느린 걸음으로 어느 전자제품 가게 앞을 지나갑니다. 무심코 바라본 화면 속에 그가 언제나 존경하고, 위로 받던 연기자가 나옵니다. 잠시 발길을 묶고 그의 말에 귀 기울입니다. 그는 가족 중 한사람에게 어떤 말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뱉느냐에 따라 그 가장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든 움직여 갈 것입니다. 드라마에는 그런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그 순간, 연기자의 태도와 말에서 위안을 받았다면, 그래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그에게 드라마는 특별한 이유로 사랑받을 것입니다.

위기론의 말들

외주제작사가 생겨 드라마PD들에게 고액의 스카우트 비용을 쥐어주기 전까지 어떤 드라마를 만드는 PD도 드라마를 상품이라고 생각해보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화려하거나 얍삽하거나 자극적인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오히려 놀리고 조롱하는 풍토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고답적이었을까요? 그런데도 왠지 그때가 그립습니다. 전보다는 못하지만, 요즘도 드라마PD들, 겉보기로는 잘나가는 것 같습니다.

스포츠지, 인터넷의 화제에도 자주 오르고, 작품이 성공하면 스타가 됩니다. 전만 못해도 봉급쟁이 수준에서는 부러운 스카웃비 받습니다. 잘하면 해외에서까지 인정을 받습니다. 참 부러움의 대상일 법도 하지요. 더구나 드라마가 한류의 주역으로 국가에 기여까지 한다니 자부심 가질 만도 합니다. 드라마 수출액은 매년 늘어나고, 국내에서 세계를 대상으로 한 독자적인 Festival도 매년 열립니다. 대작영화보다 돈을 더 많이 들인 미니시리즈도 턱턱 방영됩니다. 못하는 게 없어 보입니다. 화려한 명성에 장밋빛 미래가 질시의 대상이 될 법도 합니다.

▲ MBC 창사 47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에덴의 동쪽' ⓒMBC
드라마 비즈맨(한류를 기회삼아 드라마를 이용, 수입을 올리는 것을 주요 업으로 함)들도  잘만하면 제2의 <겨울연가>나 <대장금> 터뜨려 한몫 잡는 꿈 아직 안 버립니다. 그거 아니라도 편법 상장으로 몫돈 챙긴 분도 생겨 났습니다. 지금 매주 수목 10시에는 제작비 많이 든 드라마가 세편이나 박 터지게  손님 부르고 있어 시청자 즐겁답니다. 그 중에 스타 한분은 연장 드라마 한편에 1억5천 받았다고 알려져 있죠. 외양이 이러한데 뒷전에서 들리는 서리는 영 딴 판인 것 같습니다. 사실입니다. 예전과 조금 다른 일들이 드라마 판에서 일어나고 있답니다. 그런데 이일들을 이해하자면 좀 시간을 거슬러 가서 살펴봐야 잘 보입니다. 91년 외주제작을 정부의 정책으로 강행한 이래 드라마에 어떤 일이 생겨났는지 다 아는 일을 지금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다 아는 일이라고 미리 예단하지는 마시고 함께 생각해 봐 주십시오. 잘나가는 방송 뒤에서 들리는 현장의 목소리들은 이렇답니다.

참 힘이 듭니다. 왜 이럴까요.

<이렇게 가다가는 제작을 접을 수밖에 없다. 만들면 만들수록 적자다> PD출신 중견 외주사 사장의 이야기입니다.

<드라마를 하나 줄이는 게 수익에 도움 된다.> 1년의 대부분을, 지속적으로 제작비도 안 빠지는 광고밖에 못 붙인 드라마를 이야기하며 어느 광고담당의 의견입니다.

<내년 제작비는 일률적으로 10%씩 삭감해서 예산편성하고 수익 기여가 낮은 프로그램은 10%이상을 삭감하도록 해야 합니다.> 한 방송사의 예산 편성 지침이랍니다.

<선배들은 좋은 시절 보낸 것 같아요. 우리들에게는 앞날이 안보여요. 어떡하다 이렇게 됐을까요?> 방송사 소장PD가 선배 PD에게 한숨 쉬며 원망하는 말입니다.

<하루, 보통 회의를 3시간 하는 날도 많은데 대부분 돈, 계약 얘기를 하게 되죠. 드라마 내용, 기획안 이야기는 잠깐씩밖에 못해요.> 한 방송사 CP가 회의 끝내고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작가교육원 창작반도 우수하게 졸업했고, 많은 PD들한테 재능 있다는 평가도 적지 않게 받았는데 5년 동안 방송한줄 안 나가고 외주제작사에서 월100만원씩 받고 있어요. 매달 기획안은 쓰고 있지요. 이젠 많이 지쳤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단막이 없어진다는 말을 들은 어느 신인작가의 힘없는 말입니다.

<올해는 전체 방송사 중 드라마 시청률 1위를 했는데도 적자예상이랍니다. 이런 일은 처음인 것 같아요.> 한 행정파트 사원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입니다.

▲ KBS 2TV 수목드라마 <바람의 나라> 포스터 ⓒKBS
<방송이 황금알을 낳는 시장이라는 얘기는 옛말이에요. 이런 체제하에서는 수익을 내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PD연합회장 인터뷰에서 나온 말입니다.

<외주제작비율이 80~90%에 달한다. 그런데 이젠 외주 제작 시스템이 위기라 한다. 드라마가 돈이 안 된다는 소리다.> 한 외주 프로듀서의 진단입니다.

<방송사 나와서 지금까지 무얼 했나 싶어요. 사장이랍시고 뭐하나 쉬운 게 없고, 출연자,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스텝 한 사람 한 사람한테까지 돈 깍기 위해 사정사정하면서 지내다 보면 왜 이래야하나.> PD출신 중견 외주사 사장의 탄식입니다.

▲ 이은규 드라마PD협회장 ⓒMBC
<OO방송사는 일당 독재식, 사회주의식 거래를 하고 있다. 김정일 체제다.> PD출신 유명제작사 사장이 문화부 장관에게 언급한 내용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10명 면접하면 7명은 시사교양 PD를 지망하고요. 2명 정도는 예능을 선호하죠. 다행히 드라마 지망자가 1명쯤 있긴 있더라고요.> 올해 방송사 PD 입사시험 면접관의 면접 후일담에서 나온 말입니다.

시청자들이 보는 드라마들의 외관이 화려한데 비하면 참 이상한 일인건 사실입니다. 화면만으로 보면 한국 TV드라마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제작, 경영의 핵심 당사자들은 그야말로 도탄에 빠져 헤매게 되었을까요?

※ 연재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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