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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야기] 김진혁 EBS 어린이청소년팀 PD

정관용씨와의 인연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EBS에는 〈미래의 조건〉이라는 시사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정관용씨였다. 당시 담당PD들 사이에서는 정관용씨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는데 우선 내레이션 멘트를 거의 완벽하게(그것도 그저 한번 쓱 읽어 보고) 구사하는 그의 암기력과 ‘말빨’(?)때문이었고, 다음으로 내레이션 멘트의 내용에 대해서도 그저 적힌 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면서도 냉철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그의 적극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적힌 대로만 얘기하면 시청자가 반대쪽에 대해 오해를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그의 말, 즉 ‘편향성’을 지적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 진행자 정관용 ⓒKBS
한마디로 믿음직스러운 사회자였으니, 바삐 돌아가는 녹화에서 불필요한 NG로 PD를 고생시키는 여타 진행자와는 확연히 구별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미래의 조건〉은 폐지가 되었지만, 정관용씨는 이후 KBS로 자리를 옮겨 각종 토론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아 그야말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역시 PD들이 보는 시선은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전 웹서핑을 하다가 다소 의아한 기사를 하나 발견 했다. 정관용씨가 차후 KBS 개편에서 더 이상 〈심야 토론〉 진행을 맡지 않는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잘린’ 것이었는데, 그 이유가 프레시안의 이사를 맡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KBS가 밝힌 정관용씨 하차의 공식적인 이유는 제작비 절감이다.) 그러니까 진보 매체인 프레시안의 이사로 몸담고 있는 진행자가 토론 사회를 보게 되면 ‘좌편향’이 될 수 있다는 논리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매번 편향성에 대해 담당PD 보다 더 고민하던 정관용씨의 모습을 기억하기에, ‘편향성’에 대한 우려로 그가 프로그램에서 하차한다는 얘기를 듣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또한 MBC 〈100분 토론〉의 손석희씨와는 달리 너무나 중립적(?)이어서 최근 네티즌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다는 점에 비춰 보면 이건 그야 말로 웃기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웃지도 못하게 될 상황이 벌어졌으니 그건 퇴근길 막히는 강변북로에서였다. 운전할 때 보통 KBS 1라디오를 습관적으로 틀어 놓는 편인데 퇴근 시간이 정관용씨가 진행하는 〈열린 토론〉이 하는 시간과 비교적 일치한다.

오늘의 토론 주제는 ‘역사 교과서 편향 논란’. 오늘도 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좌편향’에 대한 주장이 넘쳤고, 동시에 좌편향에 대한 근거는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언제나 그렇듯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막힘없이 이어지는 정관용씨의 시원시원한 토론 진행! 그 덕에 부글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토론을 듣던 찰라 갑자기 낮에 읽었던 기사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 구절은 KBS 〈심야 토론〉의 한 관계자가 정관용씨의 프로그램 하차와 관련하여 밝힌 한마디였다.

“정 MC는 치우치게 방송한 적이 없는 일종의 토론 프로그램의 교과서였다”

‘토론 프로그램의 교과서!’ 아하, 그러니까 상황은 이런 거였다. 토론 프로그램의 교과서라고 하는 정관용씨가 교과서 편향 논란을 주제로 한 토론의 사회를 맡고 있고, 토론 패널은 교과서가 편향되어 있다고 주장을 하는데, 토론 프로그램의 교과서인 정관용씨는 ‘편향’되어 있어서 토론 프로그램 사회자에서 하차하지만 그는 치우치게 방송한 적이 없는 일종의 토론 프로그램의 교과서인 것이다.

▲ 김진혁 PD
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별로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이것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편향성’ 논란의 수준이며,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봐야 할 〈심야 토론〉의 수준이라는 점이다. 그 수준은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바닥이 무엇이든 그보다 훨씬 아래에 있을 것임이 확실해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세는 블랙 코미디라는 생각을 하던 찰라, 나의 손은 나도 모르게 라디오 전원을 꺼버렸다. 4명의 토론 패널 중 역사 교과서가 편향되어 있다고 주장 하는 패널이 마지막 발언을 하기 바로 직전에 끈 것으로 보아, 내 손은 분명 편향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하지만 절대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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