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든든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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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든든한 친구
[경계에서]
  • 지원준 독립PD
  • 승인 2008.11.1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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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라면 누구나, 취재를 다니면서 황당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긴 워낙 세상이 요지경인데다, PD라는 직업이 그 요지경 속을 파헤쳐야 하는 것이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바야흐로 비정규직 법을 또 고치겠다고 을러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난 번 개정 때 취재 다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노동부에서도 참으로 황당한 말을 많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황당함의 클라이막스를 노동조합을 취재하면서 겪게 되리라고는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모 자동차 노조에 취재를 갔는데, 워낙 바쁘신 분들이라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고 있자니, 조합일을 ‘좀 해 본 듯한’ 사람이 질문을 던져온다. 참고로 아래의 대화는 존댓말을  반말로 바꾼 것 빼고는 ‘말 그대로’ 그 상황을 옮긴 것이다.

조합원 : 왜 방송국 차량이 없냐?
나 : 프리랜서라 그렇다.
조합원 : 그럼 비정규직이란 소리냐?
나 : 그렇다.
조합원 : 그런데 왜 작은 카메라를 갖고 다니냐?
나 : 6mm 카메라도 그런대로 쓸 만하다.
그 조합원 : 비정규직한테 힘든 일만 시킨다고 투덜거리지 않았냐? 그게 너희들이 맨 날 하는 소리 아니냐? 그런데 왜 편하게 작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허허 웃으면 그냥 가겠지 했는데, 상당히 집요하다. 결국엔 돈은 적게 받는다고 말하며 무마하려 했더니, 또 그 소리냐는 식이다. 한 마디로 ‘지겹다’이다. 사실 그 자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취재하러 간 자리였는데, 그에게는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라는 생각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에게 비정규직은, 이유 없이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며 돈 좀 더 달라고 조르는 ‘때 쓰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 정도 받았으면 됐지, 왜 자꾸 더 달라는 것이냐’라는 말을 안타깝게도 사장님이 아니라, 노동자가 하고 있는 꼴이다. 심지어 외부에서 온 손님일지라도 비정규직이면 마음 놓고 시비 걸어도 되는 대상일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노조에서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 통합안이 다시 한 번 부결되었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었다. 조합 일을 ‘좀 해 본 듯한’ 사람의 인식이 그 정도이니, 100번을 표결에 부친들 결과가 달라질 리가 없다.

1차 비정규직법 개정 때의 핵심은, 비정규직 사용 연한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린다는 것과 파지티브 리스트(positive list) 방식이었던 사용 가능 업종을 네거티브 리스트(negative list)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 노동부 주장으로는 차별금지 조항도 핵심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차별의 내용을 법원이 규정하도록 해 놓았고(언제부터 법원이 입법부가 되었을까?) 공소 조건으로 친고조항까지 넣어 놓아서(아마도 노동부는 노동조건의 차별을 강간과 같은 범주로 보고 있나보다) 사문화 된지 오래다.

이번에는 사용 연한을 다시 ‘따불’로 만들겠다고 한다. 시간문제일 뿐이지 이대로 간다면, negative list 방식의 비정규직 법이 아니라, positive list 방식의 정규직 법이 만들어 질 텐데, 그때가면 몇 직종이나 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 재무나 기업비밀과 연관된 직종이 아니면 그 리스트에서 빠질 것이 뻔한데, 과연 그때 가서도 모 자동차 노조의 그 조합원은 아무에게나 시비 걸며 폼을 잡고 다닐 수 있을까?

그때 일은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된다는 배짱일 테지만, 그때 가면 모든 사람들이 ‘너도 한번 당해 봐라’라며 뭇매를 날릴 것이다. 조중동의 뭇매야 많이 당해서 내성이 생겼겠지만, 믿었던 한겨레와 경향까지 ‘그때 그렇게 일렀거늘’이라고 뭇매를 때리면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일까? 하긴, 지난 대선에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말 한마디에 속아 수많은 서민들이 강부자 대표에게 몰표를 줬으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 지원준 독립PD

비정규직 법 개정과 모 자동차 노조의 노조 통합안 부결 소식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노동자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가슴 깊이 든든해하고 있을 재벌들의 미소가 double exposure로 화면을 채운다. 바람이 제법 차게 느껴지니, 소주가 그리운 계절이 다시 찾아 왔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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