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다큐멘터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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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다큐멘터리를 보는 행위는 관음증의 해방구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1년 3월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송환>을 제작 연출한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특별전이 서울 광화문의 어딘가에서 며칠 동안 열린 적이 있었지요. 영화제가 끝나던 날, 김동원 감독과 함께 술자리까지 갔습니다.

그 자리엔 변영주 감독과 평론가 남인영 선생이 있었지요. 변영주 감독은 김동원 감독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어떤 그림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찍는다. 여기까지가 보통의 감독이 행하는 태도라면 김동원 감독은 그냥 찍는 행위를 벗어나 그 자신이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그림 한 가운데엔 투쟁하는 김동원을 만나게 된다.” 김동원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통한 실천가입니다. 그는 항상 저희 ‘오마쥬’가 됩니다.

그날 술자리의 주제는 ‘다큐멘터리를 왜 보는가?’였습니다. 관음증적인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싶더군요. 지금은 보기 어려워진 골목길 풍경이 되고 있지만,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만 하더라도 골목길에는 머리 높이의 자그마한 창문들이 달린 집이 많았습니다. 그런 집들에서 대학 친구들은 자취를 하고 있었답니다.

가벼운 커튼, 혹은 유리창에 한지로 도배를 한 그 옛날의 창문 말입니다. 한밤중 백열등 빛에 창이 노랗게 물들어 있으면 왠지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했었지요. 물론 그것은 일종의 관음증이었을 겁니다. 그 속에는 길거리의 풍경들과는 달리 더 노골적인 장면들이 있을 것 같고 부대끼는 세상 속에서도 결코 목격할 수 없는 어느 누군가의 내밀한 삶이 고스란히 손에 잡힐 듯 망막을 적셔올 것 같은 느낌.

사람들은 요즘 인터넷이란 가상공간을 통해 은밀한 관음증을 즐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한 관음증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면 다큐멘터리를 통한 관음증은 자신을 은닉시킨 채(?) 타인들의 삶을 합법적으로 도덕적인 문제없이 엿볼 수 있는 해방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자신 속에서 보편적이고 일상적이기에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김동원 감독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평론가 남인영 선생이 한 말입니다. 물론 다큐멘터리스트는 관음증적인 차원에서 가만히 숨죽이고 앵글을 들이댈 수도 있을 겁니다.

다큐멘터리스트는 이미 삶의 등뒤로 흐르는 더 넓고 깊은 현실에 앵글을 맞추는 게 아닐까요? 미처 의식이 건지지 못한 그저 흐르고 있는 표피적인 시간의 그 껍질을 벗겨내고서 일반인들에게는 어쩌다 한번쯤 겨우 얼굴을 비치다 마는 숨겨진 삶의 진실을 영상으로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이 다큐멘터리스트란 생각이 듭니다. 김동원 감독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저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저의 오마쥬인 김동원 감독 흉내내기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 이성규 독립PD

사실과 진실, 이것은 다큐멘터리의 가장 중요한 명제입니다. 하지만 저는 김동원 감독처럼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언행일치. 영상의 진실과 연출자의 실천이 일치되는 그런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소비적이고 말초적인 관음증이 아니라 생산적이고 실천적인 관음증을 위한 영상. 그러기 위해 저는 지금보다도 더 낮은 곳으로 천착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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