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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정태인 (경제평론가)

▲ 정태인 경제평론가
‘직업이 일정하지 않은 사람’은 괴롭다. 경찰이나 검찰 등 사법당국이 일단 눈 꼬리부터 치올리는 것이 그렇고 경제통계에서는 종종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되어 단박에 존재를 부정당하니 또한 그렇다.

지난 30년의 대부분을 ‘존재 없는 사람’으로 살아온 나도 MC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진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방송 시작 1년도 되지 않아 PD상을 받았으니 어쩌면 MC가 내 천직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물론 고참 피디라면 알겠지만 10년전 ‘CBS사태’라는 정치적 이유가 다분히 가미된 수상이었다는 점에서 그 ‘천직’ 역시 바람 앞의 촛불 신세였을 것이다).

Master of Ceremonies. 중세의 종교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이 직업은 이제 강호동씨나 유재석씨로 대표되듯, 원래 이름과는 정반대로 상쾌함과 발랄함을 지나 다소 번잡하거나 기꺼이 망가져서 일반 신자 속으로(밑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과히 나쁜 쪽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닌 듯한데, 이상하게도 시사 MC에 요구되는 것은 여전하다. 괜스레 편을 가르고 아예 MC들이 한 편에서 반칙을 일삼는 오락 프로그램과 달리, 시사 프로그램은 양 편 사이에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한다. 대통령 선거 토론에서 후보들의 발언 시간을 초시계로 재는 것이 상징하듯 기계적 형평이야말로 시사 MC의 기본 덕목이다. 찬반 양쪽이 동수로 출연하는 TV 시사 프로그램의 MC로는 묵언수행을 하는 스님이 제격일 정도다.

반면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TV 토론 프로그램은 모두 1:1 대담이다. 출연자는 언제나 그 날 주제의 전문가이고 진행자는 상대적으로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으니 MC가 얼마든지 공격적인 질문을 하고, 또 반박을 해도 편파라고 욕할 수 없다.

BBC의 〈HARDtalk〉와 폭스티비의 〈O'Reilly factor〉의 진행자는 각각 진보와 보수로 대비될 뿐 아니라 태도 면에서도 정공과 편법으로 맞선다. 〈HARDtalk〉의 전임 진행자(97년부터 약 10년을 했다) 팀 세바스천이,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집권한 외르크 하이더 (극우파 정치인)를 시종 정중한 어조로 몰아 붙인 장면은 가히 시사 MC의 귀감이라 할 만하다.

▲ 시사평론가 정관용 씨 ⓒKBS
반면 온갖 구설수와 소송에 휘말리면서도 시청률 20%를 자랑하는 빌 오라일리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그는 진행자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특권을 한껏 이용한다. 예컨대 도심의 빈민을 정부가 보조해야 한다는 출연자에게 “당신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 그것이 답”이라는 마지막 멘트를 날리고 “광고시간”이라며 끊어 버리는 식이다. 그래도 진보 쪽 운동가들이 이 프로그램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할리우드 스타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한 바 있지만)은 미국민들이 열광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철저한 준비가 없다면 아무리 미국이라도 독설과 특권만으로, 어떻게든 이 오만한 진행자의 ‘야코를 죽이려는’ 진보진영을 상대로 살아남기는 어렵다.

이렇듯 1:1 대담이라는 형식, 진행자의 능력, 그리고 어떻게든 시청자의 눈길을 끌 수 있어야 인터뷰 형식의 시사 프로그램이 살 수 있다. 우리나라에 하드토크나 오라일리 팩터 같은 프로그램이 없는 것은 과연 어떤 요소 때문일까?

사실 형식의 측면은 그런 대담을 할 수 있는 진행자가 없으면 그림의 떡이고 세 번째 요소는 떡에 찍어먹는 간장이나 설탕에 불과하다(또는 그래야 한다). 우리나라에 어떤 분야에서도 전문가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 보기에 정관용씨는 정말 몇 안 되는 후보 중 하나이다. 그가 1:1 프로그램을 하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비용 절감의 이유로 ‘짤렸다’. 그의 출연료가 도대체 얼마길래 KBS의 재정을 뒤흔드는 것일까? 오락프로그램에 떼로 출연하는 MC들보다도 많은 것일까? KBS는 왜 자꾸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걸까?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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