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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남내원 EBS'다큐큐프라임'PD

벌써 36개월이 지났다. 요즘은 기어오르고, 뛰어내리고, 매달리며 난리 법석이다. 오늘은 꽤나 만족한 눈치다. 자그마한 부상에도 개의치 않고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나서 흐뭇하게 잠을 청한다. 숨이 가빠오고 다리는 후들후들. 체력고갈. 집안은 이미 난장판. 차마 치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잠을 청한다. 이렇게 주말 동안 아빠와 딸의 라이프 사이클은 알게 모르게 비슷해져간다.

잠에서 깨어난 녀석은 새로운 먹잇감을 물색하며 어슬렁거린다. 목표물 발견. 곰돌이와 대화를 시도한다. 꽤나 진지하다. 하지만 문제는 밥 먹을 시간이라는 것. 밥상은 이미 차려져있다. 영악하게도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밥상을 회피하기 위해 곰돌이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아빠, 엄마의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먹는 자와 먹이려는 자 사이의 쫓고 쫓기는 전쟁. 하지만 결과는 항상 싱겁게 끝나버린다. You Lose!! 힘없는 자의 비애를 느끼듯 녀석은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밥을 먹는다. 이때 녀석은 새로운 작전을 구사한다.

한번 입에 들어간 밥이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는다. 음식을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는 교훈을 녀석은 창의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중이다. 노래를 부를 때는 힘겨워하던 나의 발성이 몇 옥타브를 가뿐히 넘나든다. 은근한 협박과 회유의 양동작전을 구사한다. 평소 녀석이 두려워하던 메뉴가 총동원된다. ‘생각의자’ ‘충치벌레’ ‘김치요정’ ‘스티커 안사주기’

내가 생각해도 좀 치사한 방법이다. 하지만 녀석은 아빠가 약간의 ‘죄책감’에 머뭇거리고 있던 그 순간을 잽싸게 치고 들어온다. 아내가 내게 부여한 엄중한 임무를 망각하고 쉽게 굴복해버린 소심한 아빠! 이때 내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스키너의 강화이론. 어설프게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 긍정적 행동의 강화를 위해 녀석에게 슬그머니 사탕 하나를 건넨다. 녀석은 사탕 하나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사탕을 먹으면서 거짓말을 하면 코가 쑥 커진다는 피노키오의 얘기,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독사과를 먹은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종알종알 뱉어낸다.

동화의 판타지 뒤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기는 아직은 어린 나이. ‘그래 아직은 환상의 세계가 녀석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지. 좀 더 컸을 때…’라고 흐뭇하게 생각하는 찰나, 동화를 들으며 이상했던 부분들을 속사포처럼 질문해댄다. “피노키오는 어떻게 움직여?” “착한 요정은 어디서 나타났어?” “거울이 어떻게 말을 해?” 건성으로 “그냥”이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뭔가 성의 있는 대답을 해주기 위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렇게 주말은 흘러갔다. 읽고 싶은 책은 48페이지에 그대로 멈춘 채.

▲ 남내원 EBS〈다큐프라임〉PD

또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퇴근이 늦었다. 깨지 않게 조심조심 옷을 갈아입는데 녀석이 눈을 부비며 방문을 열고 나온다. 아빠를 기다리다 늦게 잠이 들었단다. 그리고 방안으로 쪼르르 달려가 뭔가를 가지고 나온다. 내 손등에 강아지 스티커 한 장을 붙여준다. 제일 이쁜 놈으로.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고, 어제 아빠랑 재미있게 놀아서 아빠에게 붙여주는 칭찬스티커란다. “아빠 잘 자”라는 말과 함께 내 뺨에 뽀뽀를 하고서 녀석은 졸린 눈으로 사라졌다. 나는 어둠 속에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아~~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된다고 했는데!!!’ 하필이면 이럴 때 전근대적이고 고루한 남성상이 내 속에서 꿈틀거렸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와 함께 커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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