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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북경=신혜선 통신원

2008년 올해는 중국이 개혁 개방을 선언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중국공산당은 1978년 말,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를 소집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30년 동안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총집결한 기초 위에서 경제건설 위주로 정책을 전환할 것을 결정하고, 동시에 개혁 · 개방정책을 실시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른바 ‘11기 3중 전회’로 불리는 개혁개방 정책 실시 이후 중국의 각 분야는 실로 어마어마한 변화를 겪었다.

▲ 장이모우의 영화 〈영웅〉

그 중 중국의 문화산업 중 대표 분야인 영화산업은 중국의 여름을 뜨겁게 달군 베이징올림픽의 주역 장이모우에 대한 관심과 함께 한번쯤 짚고 넘어갈만하다. ‘장이모우의 30년이 중국영화 30년’이라는 말이 무색치 않을 정도로 지난 중국영화 30년은 장이모우라는 거장을 낳았고 그 거장은 결국 베이징올림픽 총감독으로 영화 그 이상을 뛰어넘는 퍼포먼스로 세계 속에 중국의 위상을 각인시켰다.

1976년 10년 간의 문화대혁명이 막 끝났을 무렵, 10년을 옭아매었던 대중들의 문화생활에 대한 욕구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영화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대중들은 예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平原游?? 평원유격대> <白毛女 백모녀> <英雄?女 영웅자녀> 등의 재상영에라도 만족해야했다.

1978년 덩샤오핑은 일본을 방문하며 <평화우호조약>을 체결, 중일관계 발전의 정치적 기초를 세웠는데, 이 때 일본으로부터 <望?망향><追捕 추격><狐狸的故事 여우이야기> 등 3편의 영화를 수입해 중국영화 관중의 욕구를 만족시켰다. 그 후 중국은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인도 등에서 영화를 수입, 방영하였는데 영화속의 대사, 영화속의 복장, 영화 속의 헤어스타일 등이 유행하며 당시 중국인민들은 영화라는 창을 통해 세계와 만나게 되었다. 

1978년 5월, 10년간 문을 닫았던 대학의 문이 열리면서 베이징영화학원에 78학번 학생 장이모우, 첸카이거 등이 입학하게 되었다. 첸카이거가 감독을 하고 장이모우가 촬영감독을 맡은 <황토기>를 필두로 기존의 교조적 형태의 중국영화가 아닌 민중의 고단한 삶과 사회의 모순을 담은 중국영화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장이모우가 감독을 한 첫 번째 영화 <붉은 수수밭>이 1988년 베를린영화제 최고영예인 황금곰상을 받았는가하면 첸카이거의 <패왕별희>가 199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는 등 이른바 중국의 5세대 감독들의 본격적인 활약이 시작되었다. 장이모우는 그후 <菊豆 국두> <?? 홍등> <人生 인생> 등의 영화를 통해 매매혼, 가족살해, 근친상간 등 사회주의 윤리규범에 어긋나는 소재를 통해 '너무나 중국적인 영화'를 선보였는데, 이런 이유로 그의 영화는 국내에 거의 개봉되지 못하는 수난을 겪는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장이모우 그의 영화 속의 주인공은 더 이상 '고단한 삶을 이고 사는 민중'이 아니었다.  진시황의 악행을 덮고 영웅적 시각을 부각시킨 영화 <영웅>을 계기로 장이모우는 사회 모순 고발 보다는 사회 안정 일조로 선회,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주역으로까지 오르게 된다.  

1994년 중국당국은 1년에 10편의 해외영화를 수입하도록 규정을 정했다. 그 해 11월 헤리슨 포드 주연의 <도망자>가 베이징, 상하이 등 6대 도시에 동시 상영되면서 놀라운 영화판매수입을 올렸고 1996년에는 <라이온킹> <투르라이즈> <타이나닉>등 헐리웃영화들이 본격 등장, 중국영화산업 발전에 기초를 닦는다. 여기에 장이모의 <영웅>이 서막을 알린 5세대 감독들의 상업영화로의 변신은 장이모의 <연인> <황후화> , 첸카이거의 <현위의 인생> <무극>등으로 이어지면서 중국영화의 대형화의 맥을 이었다.

이로서 중국영화 30년은 문화대혁명 당시의 영화정책이었던  '모델드라마' 즉, 영화를 주요한 정치선전도구로 삼아 그에 부합하는 영화만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 최근에 이르러서는 중국식 대형블럭버스터로 이어지는 역정을 겪는다.  베이징올림픽에 총감독이 중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장이모우였다는 사실과 개막식에서부터 폐막식이 마치 한편의 영화인 듯한, 그것도 최근의 중국영화 흐름을 반영하는 중국식대형블럭버스터 영화의 장면 장면을 보는 듯 했다는 건 필연적인 일이다.

▲ 북경=신혜선 통신원/ 북경연합대학 관광학부 부교수

1999년 중국은 처음으로 외국기업이나 영화관에 대해 중국 내에 들어와 투자, 합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 후 2004년 1월1일 중국정부가 처음으로 "영화가 곧 산업"임을 인정하는 내용의 정책을 발표하였다. 그런 점에서 중국영화산업의 나이는 불과 어린애에 불과하다. 하지만 베이징올림픽 개폐막식 주역으로, 여전히 영화감독인 장이모우가 보여준 저력은 향후 중국영화 발전의 가능성을 엿보는 계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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