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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야기] 김진혁 EBS 어린이청소년팀 PD
  • 김진혁 EBS 어린이청소년팀 PD
  • 승인 2008.12.01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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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혁 EBS PD
나는 정훈장교로 군복무생활을 했다. 당연히 복무를 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정신교육 강의를 했는데, 강의 내용의 대부분이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 전술이었다. 한번은 사단 헌병대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와 언제나 그렇듯 대남적화통일전술에 관련된 자료를 들고 강의를 하러 갔고, 언제나 그렇듯 북한이 ‘호심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반응이 영 신통치가 않은 것이었다. 우선 강의를 듣는 이들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었는데, 아직도 여드름이 가시지 않은 이등병에서부터 얼굴만 봐도 군 생활에 찌들만큼 찌든 상사까지 그야말로 통일성이 없었다. 이렇다 보니 어디 한 곳에 맞추어 강의를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뻔한 이야기를 하자니 영 찜찜해서, 일단 강의를 중단하고 그들이 도대체 왜 이곳에 오게 됐는지에 대해서 물어 봤다.

처음엔 머뭇거리다가 어쨌든 강사가 강요를 하니 하나둘씩 입을 떼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강사와 피교육자의 입장이 뒤바뀌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그들이 헌병대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적어도 북한의 대남적화통일전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나의 강의는 그야말로 봉창 두드리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동료들과 숟가락이나 물 컵 등을 함께 쓰는 것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다는 결벽증 증세가 있는 한 병사는 말을 잇는 도중 눈물을 흘렸고, 자기 차례가 다가오자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한 상사는 부대 근처의 한 처녀를 성추행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푼돈 수준의 공금을 횡령하다 걸린 사람, 구타 사건에 휘말려서 자기는 희생양으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어린 병사의 분노어린 눈빛까지…. 그야말로 인간극장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두꺼운 강의 매뉴얼을 덮고 과연 내가 이곳에서 더 이상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봤다. 하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나의 강의가 아니라, 누군가의 작은 격려와 위로가 아닐까 싶었다. 이후 뻔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하긴 했지만 역시 반응이 신통치 않았고, 나는 무척이나 답답한 마음으로 헌병대를 나섰던 기억이다.

▲ 경향신문 11월28일자 8면.
하지만 나는 그때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는데, 피교육자의 입장이나 관심사항을 외면한 채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가 그것이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북한의 대남적화전술 보다는 병사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에 주력했다. 그래서 군대에 오고 싶었든 오기 싫었든 적어도 여러분들이 이곳에 있기에 여러분의 부모와 애인이 후방에서 발 편히 뻗고 잘 수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불변의 사실이라는 것이 내 강의의 주요 레파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비로소 병사들과 눈을 맞추며 강의를 할 수가 있었다.

입시 지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오늘도 학교에서 학원에서 시달리고, 살아남은 이후에도 과연 제대로 된 직장이나 하나 가질 수 있을지 전전긍긍해 하는 학생들에게 ‘근현대사 강의’를 한다며 ‘대남적화통일전술’류의 이야기를 나열하고 있는 강사들을 보니, 문득 옛날 군대생활이 떠올랐다.

그들의 대남적화통일전술 이해도도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거니와, 도무지 피교육자가 처한 입장과 감정 상태, 주요 관심 사항 따위는 무시한 채 자기들이 편한 시간에 와서 일방적으로 주장을 늘어놓는 강사들을 보며 분명 역작용이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근현대사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던 이들까지도, 우파적 가치관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것이 뻔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처럼 막무가내로 강의를 할 수 있을 만큼 자기들이 힘이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면 그것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들이 말한 내용을 단 한명의 학생이라도 수긍하길 원했다면 그건 완전히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걸 흔히 혼잣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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