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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강준만 전북대 교수

▲ 강준만 교수 (전북대 신문방송학)
“지방방송 꺼!”

2008년 10월 8일 밤 내가 사랑하는 KBS 2TV 〈서울뚝배기〉를 시청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탤런트 이경진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아직도! 전에도 드라마에 나오는 “지방방송 꺼!”라는 대사를 문제삼은 글을 쓴 적은 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아주 오래된 일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론 그 대사가 사라졌다 싶었는데, 다시 출몰하다니 이게 웬 일인가.

개그우먼 조혜련이 일본 텔레비전 생방송 중에 ‘거지’라는 말을 썼다가 혼이 났다는 말을 한 걸 들은 적이 있다. 나도 놀랐다. 아, 일본이 그 정도로 높은 수준이란 말인가? 일본에선 ‘거지’라는 말조차 차별적 용어라 하여 금기시한다는데, 우리는 아무리 픽션의 세계라곤 하지만 “지방방송 꺼!”를 “잡소리 하지 마!”의 대용어로 쓰다니 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발달한 게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인터넷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좀 어이가 없을 때가 있다. 왜 그게 보수-진보 논쟁의 이분법으로 이루어지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진보파는 악플에 잘 견딜 수 있는 강심장들이고 보수파는 악플이라면 까무러치는 소심한 인간들이란 말인가? 진보파 중에서도 악플에 단호하게 대응할 걸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와야 하고 보수파 중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더 강조하는 목소리가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개인의 감수성에 대한 배려마저 이념 당파성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실종되는 사회에서 “지방방송 꺼!”라는 대사를 문제삼는 건 아무래도 부질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래서 작가나 PD를 탓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아니 내가 사는 전주의 식당이나 술좌석에서도 전주시민이 동료들을 향해 그 말을 쓴 걸 몇 차례 본 적이 있는 나로서는 오히려 “지방방송 꺼!”라는 외침에서 지방방송 더 나아가 지방 전체의 현실을 읽고자 할 따름이다.

다만 온건한 제안은 하고 싶다. 이른바 ‘방송 리얼리즘’에 관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지방방송 꺼!”라는 말만큼 리얼한 말을 찾기는 어려우리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런데 그런 ‘리얼’의 목록엔 “여자가 감히”라거나 “말단 공무원 주제에” 따위의 표현도 들어갈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하리라. 그래서 이런 표현은 드라마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누가 봐도 한심한 인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끔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방방송 꺼!”는 그런 경우가 아니다. 이건 말하는 이의 인격에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않은 채 매우 실용적인 주문으로 여겨진다.

“지방방송 꺼!”라는 대사를 쓸 수도 있다. 다만 ‘교정’의 배려는 해 주시라. 이른바 ‘교정적 리얼리즘(corrective realism)’을 시도해 보자는 것이다. 촌놈이 촌을 떠나 출세한 뒤에 촌을 멸시하는 작태를 비꼬고 조롱하는 건 어느 상황에서건 쉽게 묘사할 수 있다. 실제로 지방 출신 수도권 주민의 다수가 알게 모르게 그런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거야말로 리얼리즘의 정수(精髓)라 할 만한 것이다.

그런 교정의 뜻만 있다면, 나는 방송에서 더욱 혹독한 ‘지방모독’을 하는 걸 환영한다. 나는 서울에서 지방대학을 비하해 ‘지잡대’라고 부른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는데, ‘지잡대’라는 말을 마구 쓰는 것도 환영한다. 지방대학들이 연대해 항의를 할지 안할지는 모르겠지만, 지방은 지역주의에 중독돼 있어 자기 지역만 안 건드리면 괜찮다고 본다는 속설을 믿기로 하자.

‘지잡대’를 비하하되, 서울 명문대들은 서울이라는 입지 조건 하나로 거저 먹고 들어가는 현실도 다뤄주시라. 이른바 주요 대학들이 수도 한 복판 중심가에 까마귀떼처럼 몰려있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대한민국 말고 또 있는지, ‘세상에 이런 일이’의 프레임으로 처리해 주시라. 모두가 다 제 정신을 잃은 광기의 포로가 돼 있다는 걸 직설법으로 지적해 주셔도 좋으리라.

리얼리즘의 생명은 쌍방향성이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한다.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리얼리즘의 무대에 올리는 건 리얼리즘이 아니라 폭력일 수 있다. 리얼리즘은 양파 껍질이다. 겉만 보지 말고 한 꺼풀씩 까보자. 가증스러운 위선과 탐욕은 어느 쪽의 몫인가도 살펴보자.

방송의 진화는 기술발전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김구라가 지상파에서 맹활약하는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듯이, 리얼리즘에도 새로운 시도와 고민이 필요하다. ‘교정’을 방패 삼아 ‘리얼리즘’의 지평을 넓혀보자. 1차원적 도덕주의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체제도 만들어 가보자. 방송의 자존심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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