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스탠더드’와 ‘로컬 스탠더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준만 칼럼]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수도권 규제 문제도 좀 더 큰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중국의 자치성(省) 하나보다 작아요. 이 좁은 나라안에서조차 수도권, 비수도권으로 나누는 게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겠고요.”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 박재완의 말이다. 어찌 박재완 뿐이랴. 우리 국민 대부분이 “우리는 작다”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에서 가장 덩치가 큰 나라들과 국경을 맞대고 살아온 역사 때문이리라. 나는 몇 살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이 한국에 비해 별로 크지 않다는 걸 알고 놀란 적이 있다. 남북통일을 전제로 해서 말하자면, 한국의 국토 크기는 영국과 비슷하다. 독일은 한국의 1.5배 프랑스는 2.5배다. 인구는 한국이 영국 프랑스보다 2천만명 이상 많고 독일과는 비슷하다.

▲ 한겨레 12월9일자 5면
지난 9월 25일, 영국 방송심의정책기관인 오프콤(Ofcom)이 향후 공공서비스방송 정책에 대한 두 번째 보고서를 발표하자마자 일부 언론매체들과 시민단체들의 우려가 빗발쳤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오프콤이 지역뉴스를 줄이는 상업방송 ITV의 새로운 개편정책을 편들었기 때문이다. 뉴스가 아닌 다른 장르의 지역 프로그램 의무 방영시간도 줄었고, 전체 프로그램의 50%를 런던 이외 지역에서 제작해야 한다는 의무도 35%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50%에서 35%로 줄었다고 아우성치다니! 한국은 공영방송 프로그램 90% 이상을 서울에서 만들어도 아무 말이 없는데. 영국에서도 “우리나라 전체가 중국의 자치성(省) 하나보다 작아요”라는 말이 나오나 싶어 아무리 여기저기 살펴봐도 그런 말은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지방방송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 이유가 뭘까? 위성방송이나 IPTV와 같은 신기술 때문일까? 아니다. 나는 위기를 초래하는 주범을 “한국은 작다” 콤플렉스로 보고 싶다. 대놓고 말은 않지만, 서울의 정책 결정자들이나 방송인들은 내심 “우리나라 전체가 중국의 자치성(省) 하나보다 작은데다, 이 세계화 디지털화 시대에 지방방송이 꼭 필요하나?”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 지난 9월 22일 '민영미디어렙 도입 반대' 시위에 참석한 종교방송과 지역방송 노조원들이 선전물을 흔들고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많은 지방주민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에서 중계되는 프로그램을 로컬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면 불 같이 분노를 표출하는 일이 잦다. 나도 즐겨 보던 서울 프로그램이 사라져서 짜증을 낸 경험이 있기에 그 심정을 이해한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반대의 경우는 전혀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한국은 작다” 콤플렉스는 ‘서울 스탠더드’를 곧장 지방에 적용하면서도 그게 왜 문제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학생들에게 로컬 방송 프로그램 비평문을 써보게 하면, 대부분 서울 프로그램과 비교한 평가에 머무른다. 이른바 방송계의 ‘엄친아’ 현상이다. 서울 프로그램이라는 ‘엄마 친구 아들’ 때문에 로컬 프로그램은 늘 무시당하고 면박당하고 모욕당하기 일쑤다.

민언련이라는 언론운동 단체를 잘 아시리라. 나는 한동안 전북 민언련이 서울 민언련의 운동 방식과 의제를 그대로 가져와서 운동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한 적이 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서울 민언련이 언론사의 경영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할 필요는 없지만, 지방 민언련은 그래선 안된다는 게 내 주장이다.

‘서울 스탠더드’와 ‘로컬 스탠더드’라는 2중 기준이 필요하다는 내 지론은 방송 경영자를 보는 시각으로까지 이어진다. 서울에서 욕 먹는 사람이 지방에선 환영받을 수 있고, 물론 그 반대도 성립된다. 아니 그렇게 인식되어야만 한다. 즉, 서울과는 다른 지방의 열악한 경제사정과 지방민들의 지방방송 무시 때문에 지방 방송 경영자의 자세와 철학은 서울의 그것과는 달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 강준만 교수 (전북대 신문방송학)
연고주의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선 ‘연고주의 타파’를 외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방에서 그 말은 “니 유전자 바꿔라”와 똑같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연고주의에 공공적 성격을 가미하는 ‘공공적 연고주의’를 외치고 있다.

이른바 IMF 환란 사태 이후 한동안 신주 단지처럼 여겨졌던 ‘글로벌 스탠더드’의 한계와 문제를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는 사람이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서울 스탠더드’의 위력은 요지부동이다. 2중 기준이 늘 나쁜 건 아니다. 우리 모두 지방을 2중 기준으로 보자. 한국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