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베토벤 바이러스> 음악감독 서희태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지휘자로 일하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소리가 자기 한 사람에게 집중되니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냐는 것. 화제는 자연히 ‘음악과 방송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베토벤 바이러스>에 참여한 음악가들은 예상 밖의 엄청난 고생을 했지만 모두 큰 보람을 느꼈다, 음악이 주는 행복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기를 바랬다, 서혜경 ․ 용재 오닐 ․ 임동혁 등 일급 음악가들이 바쁜 일정 제쳐놓고 출연한 것도 모두 ‘소통’ 때문이었다, TV의 역할이 중요하다” 등등.
비엔나 유학 시절 <음악 속의 유머>라는 연주회는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연주회는 베토벤 두상에 헤드폰을 씌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근엄한 연주회가 아니라 장난기 넘치는 음악회라는 걸 암시한 것. 바순을 한참 연주하는데 악기에서 고무장갑이 튀어나오고, 술 취한 사람이 술병을 늘어놓은 채 막대기로 두드려 연주하고, 한 모금 마시고는 ‘캬~~’ 소리를 내는 등 관객을 웃기는 장치들이 이어졌다. 물론 음악의 수준과 질은 잘 유지했다.
그는 한국에서도 이런 재미있는 공연을 하면 어떨까 늘 생각해 왔다. 그가 개그맨 전유성과 함께 만든 ‘아이들이 떠들어도 화내지 않는 음악회’는 이러한 꿈의 결실이었다. 입장 연령을 5세로 낮춘 이 음악회는 애국가부터 익살스레 연출해서 어린이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소프라노 두 명이 노래하는 동안 의상 디자이너가 즉석에서 드레스를 만들어서 입히고, 성악가와 피아니스트가 신경전을 벌이다가 역할을 바꿔서 연주하고, 변훈 선생의 가곡 <명태>를 부를 때 전유성이 소주 한잔에 명태 뜯어 먹는 연기를 하는 등 청중들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연주 중에 신기한 마술을 연출하자 아이들은 완전히 몰입했다.‘아이들이 떠들어도 화내지 않는다’고 예고했는데, 아이들은 오히려 전혀 떠들지 않고 음악에 집중했다는 것. “이런 음악회는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기억될 것이고, 언젠가는 진지하게 음악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한 번의 음악회가 누군가의 일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면 한 편의 프로그램도 그럴 힘이 있으리라 꿈꿔 본다. 음악 전도사 서희태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서 어린이를 위한 재미있는 클래식 프로그램을 하나쯤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꼭 클래식을 표방하지 않더라도 같은 값이면 귀에 익은 친숙한 클래식 멜로디를 자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인기 높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일단 첫발을 내딛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12월 16일은 ‘악성’ 베토벤의 생일이다. 누구나 알듯, 그는 청각의 상실을 음악의 힘으로 이겨내고 삶을 긍정한 위대한 음악가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딛고 후세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고 숨겨진 열정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하여 그가 태어난 지 무려 238년이 지난 올해, 머나먼 땅 한국에서 그의 이름이 들어간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희망과 열정의 바이러스’를 선사했다. 베토벤은 인류의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혁명의 불꽃을 남겼고, 그 불꽃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베토벤이 활동한 1790년대~1820년대는 혁명과 전쟁, 반동이 교차하는 격동기였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에게 열광했다. 3번 교향곡 ‘에로이카’ 표지에는 그에게 바칠 헌사를 써 넣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하자 격노하여 그 표지를 뜯어 버렸다. 베토벤의 전쟁 교향곡 <웰링턴의 승리>는 비엔나를 유린했던 나폴레옹 군대의 패망을 묘사한 작품이다. 포연을 맡으며 작곡한 이 음악들에서는 늘 혁명의 발자국 소리가 울린다.
그러나 베토벤은 격동의 시대에도 언제나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의 초상을 바라보며 몇 시간 동안 눈물 흘렸던 사람이다. 누구나 멜로디를 알고 있는 <엘리제를 위하여>나 <전원> 교향곡, 로망스 F장조 - <베토벤 바이러스>에 나왔다 - 를 들으면 그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엄혹한 시련의 계절, ‘밥이 하늘’이라는 말은 준엄한 진리다. 하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 또한 여전히 진리다. 일단 먹고 사는 게 급하다. 방송사도 생존을 위해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 한다. 하지만 생존 논리에 파묻혀 자칫 메마르고 강퍅한 프로그램이 횡행하지 않을까 염려가 조금씩 고개를 쳐든다. 시청자들은 따뜻한 위로를 필요로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웃자. 그리고 우리 마음이 넉넉함을 호기롭게 뽐내자. 한 편의 프로그램이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서서히, 보이지 않게 희망과 사랑을 확산시키는 씨앗이 될 수는 있다. 꼭 클래식 프로그램을 하자는 건 아니다. 우리 PD들은 맡은 프로그램을 통해 모두 ‘작은 베토벤’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