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한파로 리얼리티쇼 인기
상태바
경기 한파로 리얼리티쇼 인기
  • 영국=배선경 통신원
  • 승인 2008.12.17 15: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후 네 시가 넘으면 어둑어둑해지는 영국의 겨울은 참 길고 쓸쓸하다. 이틀이 멀다 하고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는 난방을 해도 별로 따뜻하지 않은 영국의 집들을 더욱 차갑게 적시는 듯하다. 요즘 영국의 경제상황이 영국의 겨울날씨를 닮아있다. 고용시장은 얼어붙었고 잘 나가던 런던 금융계의 소위 ‘시티맨’들은 감원의 공포에 떨고 있다. 영국 방송계도 예외는 아니다. ITV, 채널4, 버진 미디어 등이 이미 공식적인 감원계획을 발표했고, BBC를 비롯한 공중파 채널들은 내년 프로그램 예산을 대폭 줄이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 〈스트릭트리 컴 댄싱〉에 참가한 크리스티나와 존 서전트. <사진제공=BBC>

유독 춥고 어두운 2008년의 겨울이 비단 영국의 상황만은 아니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견디기 쉽지 않은 영국의 겨울을 설상가상 이렇게 황량한 소식들 속에서 어떻게 지낼 것인가? 문득 영국인들이 올 겨울을 어떻게 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자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영국인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 특히 집착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음식이다. 사실 고기와 야채를 넣고 끓인 스튜나 고기파이 같은 영국음식은 이탈리아나 프랑스 음식에 비하면 아주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침체되어있는 올 겨울 영국시장에 유독 판매가 급증한 분야가 바로 대형 슈퍼마켓의 영국 핫 푸드 코너라고 한다. 양고기 수프, 고기파이, 핫 케이크 등의 영국 전통 음식들이 전년도에 비해 많게는 600%까지 판매가 증가한 것이다. 한 칼럼니스트의 말처럼 요즘 영국인들은 엄마의 요리나 학교 급식에서 나던 그 익숙한 맛과 냄새를 통해 올 겨울 위로를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인들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음식을 선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BBC1의 〈스트릭트리 컴 댄싱〉(Strictly Come Dancing)과 ITV의 〈X 팩터〉(X Factor)이다. 〈스트릭트리 컴 댄싱〉은 전문댄서와 유명인이 한 팀이 되어 댄스 경연을 펼치는 BBC의 대표적인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이다. 시청자 투표와 심사위원의 결정을 통해 매주 한 팀씩 떨어지고 마지막 최종 우승팀을 가리게 된다. 〈X 팩터〉는 16세 이상 가수의 꿈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영국의 대표적 탤런트 경합 쇼다. 시청자 투표와 심사위원의 결정을 통해 최종본선에 오른 10~15팀 중 우승자를 가린다.

비슷한 포맷을 가진 이 두 리얼리티 쇼의 시청률이 높은 것은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그려진 에피소드들 속에 올해만의 재미가 숨어있다. 전문 댄서인 크리스티나와 한 팀을 이루면서 올해 〈스트릭트리 컴 댄싱〉에 참가했던 저널리스트 존 서전트는 누가 봐도 뻣뻣한 몸동작으로 처음부터 심사위원들의 혹평에 시달렸다. 한 심사위원으로부터 가장 낮은 점수인 1점을 받은 적도 있는 존은 당연히 초반 탈락이 예상됐지만 매번 시청자 전화투표에서 강한 지지를 받으며 살아남았다.

급기야 결승을 한 달 여 앞둔 9주째까지 다른 팀이 탈락하는 이변이 발생하자 프로그램 안팎에서 강한 반발과 동시에 이 상황을 지지하며 즐기는 여론이 생겨났다. 결국 더 이상 우스꽝스러운 논란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았던 존은 10주째 무대에서 고별인사를 하며 스스로 프로그램을 떠났다. 〈X 팩터〉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발생했는데 프로그램 초반부터 캬바레 가수 같다는 혹평을 받았던 다니엘 에반스는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6라운드까지 프로그램에 남았다. 많은 시청자들이 다니엘을 지지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출산 중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해 무대에 서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경기 침체 속 영국인들은 따끈한 전통 코티지 파이와 함께 자신을 달래줄 이야기를 찾고 있다. 실력이 가장 우선이 돼야 할 리얼리티 탤런트 쇼에서조차 참가자들의 실력 뒤에 숨은 따뜻한 웃음과 이야기가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탤런트’가 중요하다면 분명 시청자 전화투표는 이들 프로그램의 위험요소가 되겠지만, ‘쇼’를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시청자 참여는 또 다른 흥미와 재미를 던진다.

▲ 영국=배선경 통신원/ LSE(런던정경대) 문화사회학 석사

저마다 불황을 이겨내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요즘 영국인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이야기가 위로가 되는 시기임은 분명하다. 영국의 방송사들이 제작비 절감을 외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드라마를 통해 그런 이야기가 생겨날 것 같지는 않고, 영국 스타들이 자국민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스스로 몸값을 깎으며 TV 드라마에 출연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당분간 영국인들은 대작 드라마가 아닌 리얼리티 쇼를 보며 자신을 위로할 만한 새로운 이야기를 찾게 될 것 같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