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사 다큐’는 안될까?
상태바
‘생활사 다큐’는 안될까?
[강준만 칼럼] 강준만 교수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 강준만 전북대 교수
  • 승인 2008.12.31 13:33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자는 단지 학자들이 모여 전문 영역에 국한된 의사소통을 할 때만 학자일 뿐, 그렇지 않을 땐 대중으로 흡수된다. (중략) 학자로 성장한 나는 두가지 병을 동시에 앓고 있다. 나는 학자로 성장해 자폐증의 세계에 빠져 있으며, 거실에서 시청자가 되어서는 실어증 중세를 보인다.”

최근 출간된 노명우의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프로네시스)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전북대 동료 교수들을 떠올렸다. 텔레비전 중심으로 말하자면, 교수엔 두 종류가 있다. 텔레비전을 즐기는 교수와 즐기지 않는(또는 못하는) 교수다.

나는 전자에 속한다. 교수들이 모여 지난밤 시청한 프로그램을 화제로 올리는 일은 드물지만, 신문방송학과 교수들은 전공 핑계를 대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 특권을 방패 삼아 신방과 교수들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도 시청자로서 즐긴 프로그램에 대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한다. 텔레비전을 즐기지 못하는 교수들은 그걸 비웃지만, 텔레비전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오히려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한다.

▲ KBS <다큐멘터리 3일> ⓒKBS
나는 2008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KBS2 〈송년기획 다큐멘터리 3일〉을 시청하면서 보냈다. 그것도 눈물을 질질 짜면서. 이젠 성인이 된 해외 입양아들의 고국 방문을 다룬 프로그램이었기에 슬프기도 했지만 단지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울었겠는가. 이 다큐엔 묘한 재미와 감동이 있었다.

나는 다큐 애호가다. 모든 장르의 다큐를 다 좋아한다. 아마도 내가 평생 작업으로 ‘한국 생활사’를 꿈꾸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간 나는 어설프게나마 생활사를 40편 정도 썼는데, 내가 다룬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강남(아파트)/커피/축구/레드 콤플렉스/처세술/공직자/대학입시 전쟁/어머니/개인주의/자동차/전화/바캉스/백화점/화장실/도박/관광/크리스마스/선물/결혼/장례/신용카드/미용?성형/보험/머리카락/춤바람/미신/목욕/간판/자동판매기/자전거/과외공부/어린이날/어버이날/가족계획/도시락/마약/브로커/경품/사채(私債)/연탄.

나의 이런 취향 때문이겠지만, 나는 우리 다큐에 가장 결여된 게 과감한 실험정신이라고 불평을 하곤 한다. 달리 말하자면, 다큐 제작자들이 너무 그림 위주로만 생각하는 바람에 소재의 제약을 스스로 자초하는 게 아니냐 하는 것이다. 아니 소재의 제약 이상으로 문제가 되는 건 예산이다. 좋은 그림에 욕심을 내다보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 특히 재정이 열악한 지방방송 처지에선 그런 다큐는 꿈도 꾸지 못한다.

지방방송의 현실에 맞는 다큐는 안될까? 물론 지방 다큐는 그간 성공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아왔다. 그런데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 자주 만들진 못한다. 비교적 돈과 시간이 적게 들면서 소재가 무궁무진한 장르의 다큐는 없을까? 물론 휴먼 다큐가 있기는 하지만, 소재가 무궁무진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매번 인물은 달라도 판에 박힌 듯한 ‘공식’이 느껴진다는 불평을 듣기 십상이다.

나는 ‘생활사 다큐’를 제안하고 싶다. 대중의 일상적 삶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역사적으로 다루는 다큐를 만들자는 것이다. 당장 “그림이 없다”는 반론이 나올 것 같다. 맞다. 그림이 문제다. 그러나 그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건 아니다. 보통사람들의 ‘증언’을 활용하면 휴먼 다큐의 장점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수년전부터 수십억원대 규모의 정부예산이 투입된 구술사 정리 작업이 여러 대학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학술적으론 소중한 작업이지만, 대중을 위한 건 아니다. 이 프로젝트를 확대시켜 보자. ‘영상 구술사’를 포함시켜 지방방송 정규 프로그램의 하나로 활용해보자. 한국방송협회를 비롯한 방송단체들이 나서서 관계기관들과 접촉해 지원 예산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하면 좋겠다. 이 시도가 여의치 않더라도 지방방송사 자체 예산으로 못해볼 것도 없다.

▲ 강준만 교수 (전북대 신문방송학)
‘생활사 다큐’의 생명은 탄탄한 구성이다. 그간 해왔던 것처럼 전통문화 중심으로 가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 당장 대중의 일상적 삶과 관련된 소재들을 많이 다룸으로써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성이 중요하다. 바로 이걸 돌파해내야 한다. 내가 꼭 쓰고자 하는 <한국방송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기를 새해 소망으로 꿈꿔본다.

“2009년은 지방방송에 파격적인 소재의 다큐가 붐을 이룬 해였다. 그간 자연 음식 전통문화에 치중해온 다큐가 지역민의 일상적 삶의 문제를 ‘영상 구술사’ 중심으로 다루면서 ‘PD저널리즘’의 지평이 크게 확대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정운현 2009-01-05 11:32:06
방송사들이 제작비 타령만 할게 아니라
'생활사 다큐'와 같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합니다.
제밋고, 유익한 내용이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