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로벌] 장정훈 통신원 / 런던

“탕” 차갑고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곧이어 한 여인이 쓰러졌다. 느닷없이 등 뒤로 파고든 단 한발의 총탄이 서른아홉 살 여인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녀는 그렇게 세상과 작별을 고하고 말았다. 그녀의 이름은 케잇 페이톤, 직업은 프로듀서, 소속은 BBC였다. 2005년 2월 9일,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의 일이다.

그리고 2008년 12월 21일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재판이 시작됐다. 그녀의 사망소식을 전했던 신문들은 다시, 3년이 지나 이제 막 시작된 재판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케잇은 맨체스터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1993년 BBC라디오에 리포터로 입사했다. 그리고 2년 후 TV 프로듀서로 자리를 옮겼다. 2001년 요하네스버그로 발령을 받은 케잇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을 오가며 기아, 재난, 인권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케잇 페이톤의 여동생 레베카 페이톤이 취재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언니는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다. 뭔가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BBC를 떠나야 할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위험지역에 가서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야 평가점수를 잘 받을 수 있다. 회사가 자신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지금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말했다고.

그리고 엄마가 덧붙였다. “소말리아로 취재를 떠난다는 말을 듣고 요하네스버그로 날아가 딸을 만났다. 딸은 소말리아엔 정말 가고 싶지 않지만 가야만 한다. BBC에서 계속 일을 하려면 피할 수 없다. 가서 충성심을 보여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딸을 말리지 못했다. 말리면 딸이 더 힘들어할 것 같아서 그런데 지금 그게 너무 후회가 된다”고.

케잇 페이톤은 무가디슈에 도착한지 불과 두시간만에 숙소인 호텔을 나서다 변을 당했다. 경호원과 취재차량 운전사는 BBC 취재팀이 호텔을 나선다는 이야길 사전에 듣지 못했다. 그녀는 취재팀 일행과 함께 호텔을 나와 길에서 취재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BBC 위험지역 교육담당 부서 팀장이었던 전직 군인 출신의 폴 그리브스는 소말리아는 ‘카테고리 원’에 속하는 최고 위험지역이며, 모든 저널리스트들은 적대적 환경에서 필요한 행동요령과 응급조치 교육을 포함해 최소 6일간의 훈련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케잇 페이톤에 대해 “그녀는 필요한 교육과 경험을 모두 갖춘 용감한 저널리스트였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페이톤과 함께 일했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데보라 안네 모간은 케잇이 위험평가 양식을 보여 줬을 때 너무나 상식적인 내용들로만 차 있어서 충격을 받았었다고 한다. 케잇 페이톤의 오빠도 “나의 누이동생이 그렇게 위험한 지역으로 취재를 떠나면서 안전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안전교육 이란 게 너무나 형식적인 것으로 마치 회사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요식행위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번엔 다시 엄마. “BBC가 자사의 저널리스트들에게 위험지역에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건 휼륭한 이론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론처럼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BBC를 향한 가족들의 불만이 거세 보인다. 가족과 수사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케잇 페이톤이 위험을 무릅쓰고 소말리아로 간 것은 케잇이 상사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불신을 느끼고 있었고, 그 불신을 없애줄 점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BBC의 뉴스 다이렉터 헬렌 보든은 케잇은 가장 경험이 많고 존경받는 해외담당 프로듀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혼자만의 착각 속에서 회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그래서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일까? 과연 소말리아 취재를 가지 않았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일까 말이다. BBC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케잇 페이톤의 마지막을 지켜본 피터 그레츠는 이렇게 말한다. “소말리아 취재는 내가 만든 아이디어였고 혼자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BBC의 보스가 프로듀서를 대동하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케잇과 함께 가게 된 것이었다.”

▲ 런던 = 장정훈 통신원 / KBNe-UK 대표

위험지역을 두고 주어지는 선택권이 진정 선택권으로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서슬도 퍼런 구조조정의 칼날이 거칠 것도 없이 춤을 추는 요즘, 누가 소신껏 “난 못가, 안가!”를 외칠 수 있을까. 당신의 목숨은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붙어 있는가? 조심스럽게 안부를 묻고 싶다. 소말리아에는 지금 또 다른 영국 기자가 스페인 사진기자와 함께 납치되어 있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