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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 <명의> 명의가 뽑은 명의 ‘장기려 박사’ / 2일 오후 9시 50분

EBS에서 전국 800여명의 전문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역대 명의 1위에 (故) 장기려 박사 이름이 올랐다. 존경하는 스승이자, 명의의 사표로 꼽은 ‘명의가 뽑은 명의 장기려 박사’. 참 의사였던 그의 삶을 엿보도록 하자.

▲ <명의> 명의가 뽑은 명의 ‘장기려 박사’ ⓒEBS

*1959년 최초 대량 간 절제술 성공. 세계를 놀라게 한 우리나라의 간 수술. 그 뒤에는 장기려, 그가 있었다.

출혈 때문에 사람의 몸(간)에 칼을 댄다는 것 자체가 큰 논란이 되었던 시절. 1959년 52세의 여성 간암 환자의 간 70% 정도를 절제해내는 대량 간 절제가 이루어졌다. 장기려 박사는 수술에 앞서 수많은 동물실험과 시신 해부를 통해 간 해부학적 구조를 파악하며 출혈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간엽을 8구역으로 구분하여 대량 간 절제술에 성공을 이루었다. 이는 출혈과 간의 손상을 최소화 하면서, 간 기능 회복을 앞당기기 위한 수술법이었다. 이 후, 1961년 대한 의학회에서 대통령상인 학술상을 받으며 한국 외과학계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그 의 수술법은 외과의들에게 수술의 기본이자 교과서로 통하면 이날은 후에 ‘간의 날’로 제정되어 우리나라 의학계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평생 무소유를 실천한 바보의사 … 장기려

‘나는 의학도가 되려고 지원할 때 치료비가 없어서 의사의 진찰을 받지 못하고 죽는 환자들을 위하여 의사 일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의사가 된 날투더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한 책임감을 잊어버린 적은 없없다. 나는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부산모임 1980년 4월 호 중에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평양에서 의사로 일하다 부산으로 피난 온 장기려 박사. 전쟁으로 인해 병마로 고통 받는 피난민들 속에 그가 있었다. 미군부대서 천막을 3개 얻어 시작한 것이 무료 천막병원. 마땅한 수술대가 없어서 나무판자로 짠 임시 수술대 위에서 시작했던 무료진료, 하지만 이 시간은 환자를 위해 살겠다는 의사로서의 맹세를 지킬 수 있었던 시간. 그렇게 천막병원 4년. 전쟁이 끝나고 지원이 줄어든 천막병원. 하지만 환자들을 위한 무료진료의 꿈을 버리지 못한 장기려 박사는 제 2의 인술의 베풂을 복음병원에서 시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돈이 없어 병원 문턱에도 못가는 환자들을 위해 1968년 설립한 청십자 의료보험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의료보험이 된다. 오직 환자를 위한 끊임없는 도전. 그의 무소유 삶 속에서 의사로서의 맹세를 지킬 수 있었던 시간을 들여다보자.

* 울밑에선 봉선화야 …

한국전쟁으로 이북에 두고 온 다섯 아이와 아내를 그리워하며 죽는 날까지 독신으로 지낸 장기려 박사. 이북에 두고 온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하나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재혼을 권유할 때면 장기려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하면 그는 이런 말로 완곡하게 거절했다."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밤이면 아내와 함께 부르던 ‘울밑에선 봉선화야’를 부르며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언젠가 꼭 만날 거라는 희망 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지만 그의 희망은 긴 분단의 아픔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기려 박사가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도 엿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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