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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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그릇 깨기
[e-야기] 김진혁 EBS 어린이청소년팀 PD
  • 김진혁 EBS 어린이청소년팀 PD
  • 승인 2009.01.06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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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총파업을 두고 ‘밥그릇 싸움’이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나는 싸움 중에서 ‘밥그릇’을 위해 싸우는 싸움만큼 정당성을 제대로 갖춘 싸움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이 말에 적극 동의한다. 밥그릇, 즉 먹고 살기 위해 싸운다는데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굶어 죽을 순 없지 않은가.

사실 따지고 보면 거의 모든 싸움이 밥그릇 싸움에 다름 아니다. ‘세계는 경제 전쟁이다!’라는 그럴듯한 슬로건도 결국 ‘세계에서 내 밥그릇 지키자!’라는 말일 뿐이고, 요즘 가장 유행하는 말인 ‘경쟁력’도 ‘질 좋은 밥그릇’ 정도로 생각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부모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출세’라는 것도 사실 ‘되도록 크고 멋진’ 밥그릇이고, ‘시청률’ ‘시장 점유율’과 같은 말들도 누구 밥그릇이 더 큰지 뽐내기라고 할 수 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정부가 그처럼 간절히 원하는 ‘경제 살리기’는 ‘깨진 밥그릇 본드로 붙이기’라고 보면 되겠다. 어쨌거나 그야말로 밥그릇 전쟁인 것이다.

따라서 ‘밥그릇 싸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가 않다. 문제는 밥그릇 그 자체가 아니라 밥그릇에 과연 제대로 된 ‘밥’이 채워질 수 있는 지라고 할 수 있다.

▲ "국민과 소통 거부하는 명박산성 박살낸다." 최상재 위원장을 비롯한 전국언론노조 지.본부장들이 '명박산성'을 형상화 한 스티로폼을 깨부수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있다. ⓒPD저널
방송에서 밥그릇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첫 번째 밥그릇은 ‘공영 방송’이고, 두 번째 밥그릇은 ‘민영’ 혹은 ‘사영’ 방송이다. 대개 공영 방송이라고 하는 밥그릇은 현미 오곡밥처럼 다양한 곡물들로 채워지기 때문에 건강에는 좋으나 그다지 맛깔스럽지 않은 단점이 있다. 반면 ‘민영’ 혹은 ‘사영’ 방송은 순 백미로 채워진 밥그릇이라고 보면 된다. 당장의 맛깔스러움 위주라서 입에 짚어 넣을 때는 좋으나 언젠가는 비만의 원인이 되는 단점이 있다.

지상파 방송은 현재 다 공영 1민영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지상파라고 하는 큰 밥그릇 자체가 애초에 ‘전파’라고 하는 국민의 재산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당장 먹기 좋게 흰쌀로 기름기 좔좔 흐르게 만들기 보다는 다소 퍽퍽해도 건강에 좋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국민들에겐 다소 재미가 없거나 지루하더라도 장기 복용하면 건강에는 분명히 좋은 웰빙 식단이 제공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깨서 1공영 다 민영 체제로 간다는 것은 결국 국민들이 비만에 걸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저 먹고 먹고 또 먹다 보면, 더 많이 먹고 싶어질 테고, 그러면 더 큰 밥그릇이 필요해지게 되며, 자연스럽게 ‘방송’이라고 하는 밥그릇이 자꾸 자꾸 커지니 좋을 것이라는 논리다. 물론 이게 국민들에게 좋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좋은 것일까?

다름 아닌 ‘방송 종사자’들이다. 전체 밥그릇이 커진다는 건 ‘시장’이 커진다는 것이고 그만큼 많은 방송인이 필요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방송의 경우 업무 숙련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만큼 현재 현직에 있는 방송인들은 그야말로 인기 만점이다. 연봉이나 처우가 오르면 올랐지 줄어들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지금 파업을 하고 있는 이들 입장에서는 사실 나쁠 것이 없다.

어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앞뒤가 안 맞는다. 밥그릇이 커지는 것을 반대하고 파업을 한다는 것인데, 이게 밥그릇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모순이다. 애초에 이건 밥그릇 싸움이 아닌 게다.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밥그릇에 담기는 내용물을 놓고 벌이는 싸움인 것이다.

국민들은 좋든 싫든 밥그릇에 담긴 내용물을 먹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TV가 다양해지고, 케이블, 위성, IP TV등으로 인하여 더 많은 채널이 확보된다고 해도 이건 어디까지나 ‘하드웨어’일 뿐이다. 그 하드웨어를 채우는 소프트웨어, 즉 콘텐츠는 크게 봐서 결국 앞서 얘기한 두 가지로 나뉠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닌 현미밥과, 흰 쌀밥.

▲ 김진혁 EBS PD
방송을 ‘경제’ 즉 ‘밥그릇 크기’만으로 놓고 보면 밥그릇에 담기는 내용물엔 소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단 밥그릇 크기를 늘려 놓으면 어떻게든 채워야 하기 때문에 현미 오곡밥을 정성스럽게 채우기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나마 흰쌀밥 정도라도 되면 좋으련만, 케이블 TV의 상황을 보니 애초에 ‘밥’이 될 수 없는 것들도 얼마든지 들어가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따라서 진정 밥그릇의 크기를 늘리려면, 그저 그릇 크기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그릇이 작게 느껴질 만큼의 제대로 된 곡물들을 담는 것이 먼저다. 그 어떤 방송인들도 제대로 된 현미 오곡밥이 아니면 국민의 식탁에 올려놓을 마음이 없다. 묵은 밥, 쉰밥 아무 밥이나 마구 채워 넣어야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밥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밥그릇을 깨 버리는 것이 방송인으로서 갖는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파업을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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