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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길화 MBC 대외협력팀장 (PD저널 자문위원)

▲ 정길화 MBC 대외협력팀장 (PD저널 자문위원)
‘홉슨의 선택(Hobson's choice)’이란 영어 숙어가 있다. 이 말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위키피디아를 뒤져 16,7세기 영국 캠브리지까지 가야 한다. 홉슨의 풀 네임은 토마스 홉슨(Thomas Hobson 1544? - 1630). 그는 캠브리지에서 마구간을 소유한, 말하자면 말 임대업자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장거리를 가는 손님들에게 말을 빌려주는 사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는 말을 렌트하려는 캠브리지대 학생 등의 고객들에게 아무 말이든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홉슨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말의 속성상 마구간 구석에 있는 말을 억지로 끌고 나오기는 힘들다고 한다(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유능한 말 임대업자 홉슨은 고객들이 자기가 아끼는 말들을 잘 간수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보유하고 있는 말들의 순환을 위해서 싱싱한 말은 안쪽으로 보내고 입구에는 마구간에 들어온 지 오래된 말, 상태가 시원찮은 말들을 세웠다. 이를테면 선입선출의 원칙을 적용시킨 셈이다.

어떻게 되겠는가. 원하는 말을 마음대로 골라 가라고 했지만 고객으로서는 입구에서 가까운 말 순서대로 빌려갈 수밖에 없다. 아니면 말거나. 이후 ‘홉슨의 선택’은 주어진 것을 받거나 아니면 그만 두거나(take it or leave it)를 뜻하는 즉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have no choice at all)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빵이냐 밥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빵이냐 굶느냐’의 경우가 전형적인 ‘홉슨의 선택’이다. 

웬 난데없는 말타령이냐고? 방송악법 직권상정 저지 이후에 진행되는 국면이 문득 왕년에 배운 이 말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정부 여당의 태도는 토마스 홉슨과 거의 다름없다. 지상파에 신문사, 대기업의 참여를 허용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고, 17대 국회에서 충분히 논의되어 더 이상의 공론화는 불필요하니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법안을 받거나 말거나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거나’가 도대체 가능치 않으니 이것이 문제다. 나아가 MBC 민영화에 이르면 가히 홉슨이 되살아나더라도 울고 갈 지경이다.

▲ 경향신문 1월7일자 4면
주지하다시피 정부 여당이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7대 미디어 악법은 신문사와 대기업에 종편 PP, 보도채널은 물론 지상파에 진출할 수 있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주려는 것이다. 지상파의 경우 20% 제한이라고는 하나 컨소시엄 방식으로 신문사간의, 대기업간의 나아가 신문사와 대기업간의 합종, 연횡으로 얼마든지 지상파를 지배할 수 있다. 또 신문사와 대기업이 종편 PP에 진출하는 것만으로도 기존의 방송 미디어 분야에는 큰 타격이 올 것이다. 종편 PP만으로도 효과는 사실상 지상파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방송 시장의 재원이 한계에 부닥친 상황에서 ‘플레이어’를 난개발하는 정책의 위험성은 케이블, 위성방송, DMB, IPTV 등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드러났고 또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정부 여당은 일자리 2만 6천 개 창출과 글로벌 미디어 기업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수사만을 늘어놓으면서 밀어붙이고 있다.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언어의 주술적 기능에 사로잡혀 정말 그렇게 믿게 된다는데 그런 모양이다.

학계의 전문가들이 법을 바꾼다고 일자리가 쏟아지지 않고, 언어적 기반이 취약한 한국어 뉴스콘텐츠로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이들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국민의 60% 이상이 이 법안에 반대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이 언필칭 말하는 신성장 동력의 명분 이면에는 기존 매체 판도의 와해, 정권 창출 기여 세력에 대한 논공행상과 향후 우호적인 정권 기반을 조성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본다. 핵심은 경제가 아니고 정치인 것이다.

그래서 이 7대 미디어법안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정부 여당은 미디어법안과 함께  공영방송법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공영방송의 경우 광고수입이 전체 재원의 20%를 넘지 못하도록 하고, 나머지 80%는 수신료로 운영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답보 상태에 있던 수신료의 현실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사장 교체 이후 KBS의 정체성과 행보에 대한 불신과 의혹이 점증(漸增)하는 상황에서 시청자들로부터 수신료 인상을 뜻대로 이루어낼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이렇게 되면 문제는 MBC다.

▲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방송통신위원회
그동안 MBC는 공영방송이면서도 국민에게 수신료 등의 부담을 주지 않고 광고를 재원으로 자력갱생을 해 왔다. 드라마왕국으로서 한류 콘텐츠의 진원지이며, 공익적이고 실험적인 예능 프로그램으로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명품 다큐멘터리 <북극의 눈물>은 MBC의 저력을 보여준 것이다. 이전 정권에서는 한미 FTA를 비판하고 황우석 박사의 의혹에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현 정권 들어서는 미국 쇠고기 졸속 협상을 지적하고 미네르바 구속으로 인한 표현의 자유를 우려하는 등 권력에 대한 비판 기능을 잃지 않는 독립적인 공영방송이 MBC다.

그런데 MB 정권은 이런 MBC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지난 대선 국면에서 BBK 의혹을 제기해서인지, 또 < PD수첩> 광우병 보도로 촛불의 도화선이 되어서인지 MBC의 존립과 정체성에 심대한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한나라당 미디어 악법의 표적은 한마디로 MBC다. 지상파와 종편 PP에 신문사와 대기업의 진출을 허용하고 공영방송법까지 만들어 MBC를 압박하고 있다. 그리고 MBC로 하여금 이제 공영이든 민영이든 스스로 선택하라고 한다. 알아서 선택하라는데 실상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다. 바로 이 글의 들머리에서 나온 ‘홉슨의 선택’ 방식이 아니던가.

최근 정부 여당 관계자들의 말들이 모두 그러하다. 정병국 한나라당 미디어특위위원장은 “정부 여당은 MBC나 KBS2를 민영화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MBC의 길은 스스로 선택할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법안, 공영방송법은 MBC 민영화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보수신문의 사주들이 다투어 방송진출을 기정사실화하고 있고, 전경련 등 경제 5단체가 미디어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고 있는데 말이다. 기존 채널이 아닌 새로운 지상파 채널의 등장은 주파수 사정상 기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고 경영상으로도 맞지 않다. 그렇다면 이들 신문사, 대기업이 취할 다음 수순은 명백하다.

▲ 방송문화진흥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축하 떡을 커팅하는 모습 ⓒPD저널
지난해 연말 방문진 20주년 기념식장에 와서 “MBC의 정명(正名)은 무엇인가”라고 힐난했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국회에서 다시 “MBC가 민영방송이 될지, 공영방송이 될지는 자체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MBC가 지난 20여년 동안 방문진법에 의해 공영방송으로 규정되어 ‘국민의 공영방송’으로 영위하고 있는 바를 도대체 인정하지 않고 있다. 더 이상 MBC가 무슨 선택을 하기를 바라는가. 최위원장은 이미 “민영방송이 더 다루기 쉽다”는 속내를 드러낸 바 있다. 

이어서 한승수 총리까지 나섰다. 한 총리는 KBS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 “미디어 통합 융합이 세계적 추세인 만큼 우리도 칸막이를 없애 방송산업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전제한 뒤 “이 칸막이를 푸는데 방송인들이 앞장섰으면 좋겠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한 총리는 또 “KBS2와 MBC를 민영화하지 않느냐는 얘기도 나오지만 정부로서는 그런 의도가 추호도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부 여당 관계자들이 한결같이 민영화를 부인하며 MBC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는 도회술(韜晦術)로 여겨질 뿐이다. 미디어법, 공영방송법 등 모든 조건이 정부 여당의 의도대로 진행된다면 MBC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홉슨의 선택’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400년 전 그 영리한 홉슨이 마구간 사업에서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 아끼는 말들과 함께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는지 역사는 말해 주지 않는다. 그와 그의 말들은 가고 없고 그의 이름만 말로 남아 있다. 이제 한국에는 ‘홉슨의 선택’이라는 말 대신 ‘MB의 선택’으로 바뀌는 일만 남았는가. 아니면 이를 늠연히 극복하는 ‘MBC의 선택’이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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