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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눈] 김현정 CBS PD

#1 “아, 뭐 이런 X같은 경우가 있어?!” “죄송합니다” 연신 사죄를 하는데도 나의 이웃은 막무가내로 욕을 쏟아 붓는다. 얼마 전의 일이다. 부엌 천정에서 물이 떨어진다며 아래층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러저러한 사정에 빨리 처리해 주지를 못했다. 그 집도 더 이상은 물이 떨어지지 않는지 재촉을 하지 않았고 흐지부지 된 채 2달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연락이 와 찾아간 그 집에서는 예상 보다 훨씬 강한 톤의 불만이 날아온 것이다.

“짜증이 나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 뭐 이런 뻔뻔한 사람들이 다 있어!” 저간의 사정도 듣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모욕적인 말들만 날려 보내다니…. 미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울화가 치민다. 일부러 하수구에 구멍을 낸 것도 아니고 오래된 아파트의 파이프 부식 사고인데 싸우자면 대판 싸울 판이다. 하지만 꾹- 참는다. 공동주택에서 아랫집과 윗집의 관계는 갑(甲)과 을(乙)이라는데 ‘을’입장에서 맞대응해봤자 득이 될 리 없기 때문이다. 참는다…. 참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순간 생각한다. 나는 참으로 을의 처지에 서본 적이 별로 없었구나!

#2 세상 많은 ‘을’ 가운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을’들이 먼저 떠오른다. 지난 해 백화점 점원들의 삶을 인터뷰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하소연은 눈물겨웠다. “세상에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어요.” 그들의 일성이었다.
“저는 지하주차장에서 주차 안내를 합니다. 매연 속에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고 어느 층으로 가라고 지시를 하죠. 그러면 대뜸 화를 냅니다. 자리가 있는 것 같은데 왜 아래층으로 내려 보내느냐는 항의죠. 곱게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삿대질을 해가면서 저리 비키라는 겁니다. 나이도 어린 사람들이 그럴 때면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 같지만 꾹 참습니다. 거기서 화를 냈다가는 해고니까요.”

의류층에 근무하는 점원은 더한 얘기를 전한다. “분명히 입은 흔적이 있는 옷을 들고 와서는 환불을 요구하는 겁니다. 아무래도 입은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다짜고짜 사람을 의심했다며 ‘백화점 측에 신고를 하겠다, 고객을 뭐로 보느냐, 너 같은 사람 하나쯤은 당장 해고시킬 수 있다’고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순식간에 구경꾼이 모여들었고 저는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죄송할 일은 아니었지만 고객과 싸웠다가는 득이 될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속병이 생겨 그만두는 직원도 많아요.

▲ 김현정 CBS〈김현정의 뉴스쇼〉PD

#3  ‘손님은 왕’이란 의미가 인격적으로 모욕해도 좋다는 뜻은 아닐 터인데 우리 주변 곳곳에서 이런 광경은 쉽게 목격된다. 광고 전단을 건네다 욕설을 듣는 거리의 알바생, 보험 한 번 들어보라고 했다가 “재수 없다”며 무안만 당하는 보험아줌마… 그 뿐 아니다. 주인과 세입자, 원청과 하청업체, 상사와 부하직원 등 세상 많은 관계 속에서 나는 갑도 되고 을도 된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좋은 ‘갑’이었던가. 이웃집의 뚫어진 천정 덕에 나는 또 이렇게 인생을 배운다. 세상 모든 ‘을’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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