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절한 언론인의 투쟁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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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절한 언론인의 투쟁일지
[헨드릭스의 책읽기] (1) ‘대한민국 지역신문기자로 살아가기’ (김주완)
  • 헨드릭스/ 블로거
  • 승인 2009.01.16 08: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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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상관없는 미디어

단상 하나.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거나 아침 정보프로그램을 보면서 눈을 비비며 밥을 먹고, 차에 올라타 라디오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영어회화를 중얼거리거나 혹은 뉴스를 듣고 아니면 지옥철에서 MP3에 잘 쟁여놓은 음악들을 들으면서 출근을 한다. 출근 후 네이트온 메신저부터 켜놓고 한참 친구와 상사 욕을 한 후, 인터넷을 켜 뉴스를 뒤적거린다. “세상, 참 x 같네” 속으로 외치곤 뉴스 창을 덮고 아침 회의에 참석하러 목을 가다듬으며 가는 길,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기사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지 못한다. 물론 사회면을 읽다 보면(거의 요즘은 읽지 않는 것 같은데) 불쌍한 사람들, 사건 사고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견하지만, 그건 ‘남’의 일일 따름이다. ‘주요’ 미디어를 뒤져도 우리 동네에서 벌어지는 나와 맞닿는 ‘소소한 나의 이야기’ 혹은 ‘우리의 이야기’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매번 불편한 집 앞의 횡단보도는 신문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9시 뉴스에도.

단상 둘.

이따금 집에 오는 ‘중랑구민회보’를 읽게 된다. 마치 ‘땡전뉴스’를 보듯이, 구민회보에는 중랑구청장이 한동안 했던 일들에 대한 브리핑 같은 스트레이트 기사와, 구청에서 실시하는 행정정책들에 대한 ‘홍보성기사’가 대부분이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지역사회’의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내가 동네에 살면서 느꼈던 불편들에 대한 ‘고발성 기사’, ‘심층 보도’를 그런 ‘회보’를 통해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내 주위 이야기를 하는 것들은 ‘신랄하질’ 못하고, ‘신랄한’ 비평이 있는 글들은 나와 상관없는 생경한 이야기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거다. 그리고 그게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성하는 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을 보라. 책의 서두부터 나오는 비장한 이야기.

이러다 보니 서서히 지친다는 생각도 든다. 기존 지역신문들이 언론으로서 역할을 포기하고 토호, 기득권세력의 대변지로 전락해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제대로만 한다면 어렵잖게 성공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도 슬슬 회의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오히려 언론의 정도를 걸으려는 건전한 지역신문보다는 온갖 사이비 짓을 서슴지 않는 이상한 신문들이 생명력은 더 질기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경남도민일보〉가 하는 데까지 해본 후, 도저히 희망이 없으면 장렬한 전사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간정신과 정체성, 그리고 언론으로서 기본적인 윤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우리 사원들의 밥그릇을 위해 존립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신문사를 유지하는 건 사회적인 해악이다(여는 말 ix-x).

▲ 대한민국 지역신문기자로 살아가기 (김주완,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추적60분〉이나 〈PD수첩〉 등의 사회고발 프로그램에 나오던 ‘사이비 기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신문 기자를 빙자해서, 혹은 실제 기자로서 지방 기업들이나 지방의 행정기관에 ‘출두’하여서 마치 암행어사처럼 ‘냄새’를 맡은 척하고 그것을 빌미로 돈을 뜯어내는 인간들 말이다. 난 지방지는 으레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기자가 있었다. 사실 처음엔 좀 놀랐다. 기껏 신문을 구분 할 때 〈조중동〉 VS 〈한겨레 경향〉 + 인터넷 미디어 정도만 생각했던 내게 이런 기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경남도민일보〉같은 신문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웠다. 그리고 비장한 각오가 찌릿찌릿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자신의 동네의 일을 ‘신랄하게’ 털어주는 신문을 꿈꾸고, 실제로 만들던 사람이 있던 거다.

대한민국 지역신문 기자로 살아가기

그의 이야기는 아무리 ‘쿨’하게 이야기하려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책의 첫 이야기는 ‘촌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습시절 기자는 선배들에게 용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나마 ‘운동권’으로 활동했던 이력 등을 통해서 나름의 기준이 있었던 저자도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심지어 나는 1970년대 운동권 출신의 한 순진한 야당후보에게 “촌지를 돌려야 기자들이 신경을 쓴다”며 조언을 해 주기까지 했다. 물론 변명할 말도 없진 않다. 후보 측에서 주는 촌지를 끝까지 거부할 경우 그에게 적대적인 기자로 분류될 소지가 많고, 그럴 경우 취재원으로서 접근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야당후보에게 한 ‘촌지조언’도 내가 심정적으로 지지하던 그 후보가 언론에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게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나온 말이었다(p.5).

재벌언론, 언론재벌, 토호언론의 문제점을 성토하고, 거대언론의 여론독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자신의 일과 부딪히면 영향력 있는 언론을 찾고 그들의 눈치를 보는 이들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p.63).

내가 지역에서 기자생활을 해오면서 확실히 느낀 게 있다. 우리사회는 결코 보수와 진보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기회주의자와 비기회주의자의 투쟁이라는 것이다(p.139).

 

 

 

이런 문제점들을 느껴 기자는 〈경남도민일보〉를 창립하면서부터 자정운동을 전개했고, 1만 원 이하의 기념품류를 제외한 이상의 촌지는 받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해를 못한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야~ 너희들 참 대단하다. 그래, 그런 언론이라도 있어야 우리사회가 그나마 지탱할 수 있지”라는 반응이 그 하나요, “너 아직도 그렇게 사냐, 나이 40이 넘은 놈이 우째 그리 꽉 막혔냐”는 게 또 다른 반응이다. 대놓고 표현은 안 하지만 ‘참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거나, 듣고 있기가 답답한지 얼른 대화를 바꿔버리려는 사람도 있다(p.26).

‘불가근 불가원’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권력과 언론의 관계에 대한 원칙. 지역언론은 ‘지역’이라는 것이 주는 특수성 덕택에 쉽게 취해만 갔고 벗어날 수 없었던 거다. 지방자치단체는 지역언론에게 ‘사탕’을 주면서 어르고, 지역언론은 떡고물을 먹고, ‘홍보성 기사’만 작렬하게 된다.

또한 ‘연고’와 ‘인맥’이라는 한국사회에서의 ‘족쇄’는 그나마 더 좁은 지역사회에서 ‘극’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각 대학의 언론동문회를 보라. 철판 깔고 진실 앞에서만 고개를 숙여야 할 기자들도 ‘선배’ ‘후배’ ‘동기’라는 틀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는 거다. 게다가 그것들은 ‘조직’아닌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경남도민일보〉 구성원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건 바로 안면과 연고라는 괴물이다. 지역사회라는 게 워낙 촘촘한 인맥으로 구성돼 있는 데다 지역언론들 또한 직장에서 벗어나면 이 같은 인맥의 그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역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p.91).

이런 상황에서 누가 지역언론을 무서워하겠는가? 싸움이 원초적으로 힘든 이유다. 토호들의 이익에 대한 폭로, 지방권력에 대한 견제 등은, 실제 그들과 어쩔 수없이 엮이는 ‘안면과 연고’덕에 막히는 것이다.

게다가 선거 때가 되면, 약 먹은 지역언론은 중앙일간지에게 완벽하게 헤게모니를 장악 당한다.

지방선거는 대통령선거와 달리 선거 한 달 전까지도 정확한 후보군이 확정되지 않는다. 아직 6개월이나 남은 대선 후보의 이름은 모르는 국민이 없지만 지방선거 후보자들은 대부분 일반시민들이 모르는 인물들이다. 여론조사는 이처럼 후보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실시된다.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질문을 받은 시민은 그냥 귀에 익은 사람을 선택하게 되고, 결국 인지도가 조금이라도 높은 한나라당 후보나 현직 단체장이 압도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결국 여론조사는 유권자의 무관심이 낳은 초반의 왜곡된 판세를 종반까지 고착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p.127-128)

인맥과 안면을 통해 전해지는 촌지와 연고, 인맥으로 무뎌진 지역언론의 물렁한 보도, ‘선거’ 때의 중앙일간지의 여론조사를 통한 ‘지역주의 정당’의 수성. 그래서 더더욱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또 말하지 못하는 지역언론. 사회의 보수화는 우리의 밑바닥에서부터, 지역에서부터 출발한 거다. 기득권이라는 힘의 구도는 한 번도 재편되지 않았고 이런 식으로 지켜진 거다.

〈88만원세대〉의 저자 우석훈(사실 그의 핵심적인 인식은 〈직선들의 대한민국〉에 있다. 한 번 읽어보라)은 우리들의 ‘개발주의 미학’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곤 하는데, 사실 그 ‘개발주의 미학’의 정점에 지방의 ‘토호’와, 그들과 결탁한 관료들을 빼놓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토호’들에 대한 견제가 이러한 배경에서 작동하지 않는 거였다. 이를테면 국가가 대운하를 파려고 할 때 한 몫 하려는 토호들과 관료들은 이런 상황을 즐기고,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는 지역언론은 입을 닫고, 삽질은 계속된다는 거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갑갑한 것인지에 대해서 저자는 뼈저리게 느낀다. ‘북악산’을 본 사람만이 뼈저리게 느끼는 게 아니다. 그래서 김주완의 이야기는 모조리 아플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그렇다고 김주완이 싸움을 멈추고, 분을 못 이겨 음독이라도 했는가? 아니다.
 

▲ 김주완과 김훤주의 블로그(http://2kim.idomin.com)
김주완은 여전히 소소한 지역의 이슈들을 가지고 끈질기게 ‘탐사보도’를 통해서 밝혀내고 있고 또 그 문제들을 고쳐내는 일들을 해내왔고, 또 해낼 것이다. 그의 기록들은 여전히 진행되어온 투쟁의 역사이자, 전망을 세우는 초석이 되는 것이다.

요 며칠 한국의 언론환경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비관’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끈덕지고 미련한 놈”이 이기는 거라는 학교 후배인 기자녀석의 이야기가 귓전을 때리고 있는 도중 이 책을 읽게 되었고, 다시금 끝까지 ‘항복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사람들에게 ‘나’와 그리고 ‘가까운 우리’의 이야기가 있는 그런 기사를 혹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힘없는 자의 편을 드는 것은 물론 나아가서는 정치적 당파성을 확실히 밝히는 것”(p.265)라는 그의 공공 저널리즘의 언명을 잊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 마르코스

아직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은 당신. 이 책을 읽고 다시 ‘날’을 세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신 주위의 소소한 공간에서 ‘권력’에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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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2009-01-17 16:50:56
저로선 황송한 내용입니다만, 한편으론 채찍질하는 말씀으로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긴장하게 해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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