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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세상읽기]

▲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88만원 세대 저자)
작년 〈한국일보〉에서 ‘내 인생의 책’을 선정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상당히 곤란한데, “그 때 그 때 달라요” 했다가는 어디에서 “그 때는 그거 아니었잖아”라고 봉변을 당할지 몰라서 신경이 쓰인다. 어쨌든 고심하다가 불현듯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내 인생의 책으로 골랐다. 더 묘한 기분이 든 것은 그리고 며칠 후 이청준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이다.

왠지 머릿속에서 이청준이 떠올랐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에이, 뻥이지”라고 할 것 같아서 입 다물고 있었지만, 정말 기분 묘했다. 한국 소설 중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을 아주 솔직히 꼽아보자면, 〈당신들의 천국〉, 이병주의 〈지리산〉 그리고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사회의 원형에 대한 이미지들은 어쩌면 이런 소설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이런 소설들은 리얼리즘 미학이 지배하던 좌파 계열의 프로문학은 아니고, 심미주의를 끝까지 몰고 간 한국식 예술소설이자, 우리들의 깊은 무의식과 연계되어 있는 소설들이었다. 이 세 개의 소설의 모티브를 찾아보자면, “완력으로 통치되지 않는 나라”에 관한 태고적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를 지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청준이나 한참 좋았던 시절의 이문열, 그런 얘기는 벌써 태고적 전설이 되어있다.

특히 이청준과 이문열이 한국에서는 우파 계열의 문학을 각각 대표한다고 할 때, 이들이 가지고 있던 질문은 이 나라는 도대체 완력으로 통치가 되지 않고, 아무리 멋지게 포장을 하고, ‘동상’을 세워준다고 해도 때때로 전복을 일으키고, 원장을 잡아 죽이고야 마는 소록도 나환자 같은 존재로 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럴까? 어쨌든 한국의 독재자들은 힘을 과시했던 전형적인 메갈로매니아 스타일이었지만, 그들의 끝도 영광스럽지는 못했다.

이런 전통 속에서 한국을 생각해보면, 의외로 ‘접수’는 쉽지만 ‘통치’는 어려운 나라 정도로 정형화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왕조인 조선은 일본에게 너무 허무하게 넘어갔지만, 일본의 한국 통치는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명박 정부 스타일로 일본이 한국을 통치했다면, 1~2년도 못 넘기고 바로 중대한 장벽에 부딪히지 않았을까? 박정희도 최소한 ‘논두렁의 막걸리’와 같은 이미지 정치에는 아주 능수능란했던 독재자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시절을 아직도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 KBS PD협회 소속 200여명의 PD들이 18일 오후 4시 'KBS 파면사태'에 대해 규탄집회를 열고 있다. ⓒPD저널
KBS 사장의 사원행동 지도부에 대한 일방적인 파면 및 해임 조치를 보면서 “쯧쯧”하고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KBS의 사원행동 쪽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외부에서 지켜보기에는 이들은 결국 졌고, 노조선거에서도 졌다. 내버려두면 “한 때는 그랬었지” 하면서 금방 순치되면서 조용해질 사람들이었다는 게 나의 이해이다.

MBC의 파업 때, 농성장을 방문하면서 동시에 다른 방송 때문에 KBS 간부들을 잠깐 볼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가 뭘 어쩔 수 있겠느냐”고 금방 순둥이가 되어버렸던 사람들이 바로 내가 만나본 KBS 직원이다. 그런 그들을 힘으로 눌러서 통치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우리는 나약하고 용기가 없어서, 쉽게 접수되는 그런 민족일지는 몰라도, “살아서 동상을 만들려고 한 사람”의 그 동상까지 칭송하고 굴종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소록도 원장들의 최후가 어땠는지, 그 생생한 현실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2009년 1월달의 한국이 아닌가? 우리는 힘으로 통치되는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청와대와 정권 핵심부는 아직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시인 김수영이 〈공자의 생활난〉이라는 시에서 노래했다. “그것은 작전과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작전과 같은 것, 특히 완력에 의한 전격 작전, 그게 한국에서는 잘 안 통한다. 파면, 해임, 그런 몽둥이로 때려서 통치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라는데도 이명박 정부는 자꾸 완력으로 통치하려 한다. 정녕 소록도의 광란의 밤을 보고 싶은가?

70~80년대 한국의 우파들은 한국을 이해하려 한 것 같은데, 지금 청와대의 우파들은 한국의 속성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범생이이자 순둥이 PD들, 그들과 왜 싸우려 하는가? 왜 그들을 소록도의 나환자처럼 끝으로 몰아가는가? 완력, 그 끝이 허무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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