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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야기] 이정호 참세상 편집국장

▲ 이정호 참세상 편집국장
2008년의 화두가 ‘촛불’이었다면 1991년은 ‘강경대’였다.

강경대 정국이 한창일 때 브루스 체스만이란 영국인 스트링거는 1991년 5월 22일자 홍콩의 일간지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에 기사를 실었다. 스트링거는 특정 언론사에 소속된 기자가 아닌 프리랜서 기자다.

기사는 1인칭 주어로 시작돼 독자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체스만은 1991년 5월18일 강경대 군의 장례식이 있던 날, 연세대 정문 맞은편 고가 철둑길에서 분신 투신한 이정순 여인에 관한 것이었다. 체스만은 기사에서 “여인의 몸이 불타고 있었는데도 불을 끄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불을 끄려고 하는 자신을 누군가 잡아당겨 방해했다”라고 썼다.

같은 날 중앙일보가 체스만의 기사를 3단 기사로 비교적 자세히 인용, 보도했다. (중앙 1991년 5월22일 2면 <분신자살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다음날 아침에도 해설기사를 보태 운동권의 비도덕성을 맹렬히 비난했다.

중앙일보의 의제에 방송은 숟가락을 얹었다. 확인도 않은 채 체스만의 선정적인 기사를 무조건 인용했다. 그날 밤 유서 대필사건까지 겹쳐 주요 방송사 메인뉴스에선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운동권 학생들의 ‘비도덕성,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비난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MBC 이진숙 기자는 <오늘밤 마이크가 그립다>는 자신의 수필집에서 체스만 사건의 진실을 회상했다.

“당일 연세대 맞은편 철둑길 아래의 분신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체스만의 기사가 믿기지 않아도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분신 직후 이정순 씨가 쓰러져 있는 현장에 있었고, 체스만의 말과 달리 여러 청년(학생들)들이 웃옷을 벗어 불을 끄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이진숙 기자는 “MBC 간부에게 사실과 다른 이 기사를 내지 말아 달라고 다른 두 선배와 함께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MBC 노조는 이 무책임한 인용, 보도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중시하고 다음날 노보 특보를 발행해 사내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어 <한겨레>와 <언론노보>도 이 문제를 기사화하고 무분별한 외신 남용 보도를 자제해 줄 것을 촉구했다. 다음은 <언론노보>에 실렸던 이진숙 기자의 목격담이다.

“91년 5월 18일 오전 11시, 발인 예배가 끝날 때쯤 (중략) 갑자기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철둑길 아래로 달려갔다. 나도 그곳으로 뛰어갔다. 이정순 씨가 분신한지 얼마 안됐을 때였다. 주변 사람들은 둘러서서 불을 끄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응급차 불러’ ‘길 비켜, 길 비켜’ 하는 소리와 함께 그냥 울부짖는 남학생의 모습도 보였다. 두세 명의 남학생들이 ‘기자 ++들 빠져’ ‘사진 찍지마’ ‘똑바로 보도하지도 못하는 것들이 찍긴 왜 찍어’라면서 사진기자들을 끌어내는 것이 보였다. 이미 학생들이 시신을 신문지에 싸서 옮기고 있던 터라 6-7명의 사람들이 이씨를 들고 그냥 세브란스로 뛰었다. 이 여인은 도착 즉시 사망했다. (중략) 체스만은 ‘아무도 불을 끌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애썼으며 여인의 묵숨을 살리기 위해 병원으로 가려고 노력했다. 현장 사진에서도 드러나듯 함께 불을 끈 사람은 많았다. (중략) 체스만이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으나 아무도 꼼짝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 것도 사실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병원으로’ ‘차 불러’라고 외쳤으며 주위 사람들도 길을 터주는 등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중략) 나는 체스만의 기사 중 유독 ‘운동권 학생들이 죽음을 방조하고 오히려 원한다’는 부분만 우리 언론들이 무책임하게 인용, 보도한 것에 대해 놀랐다.”

체스만 기사의 진위 여부보다 외국 언론에 나오면 무조건 따라가는 우리 언론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 신문방송 겸영을 놓고 요즘 여야가 벌이는 공방도 이런 함정에 빠져 있다. 겸영하는 외국 사례는 금과옥조처럼 여긴다. 외국 사례는 사례일 뿐이다. 우리 언론의 겸영 역사가 어떠했는지 평가하는 게 더 중요하다. 70년대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은 그 좋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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