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눈] “집에 보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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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눈] “집에 보내줘!”
  • 공태희 OBS 〈문화전쟁〉 PD
  • 승인 2009.01.21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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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1월16일) 새벽, 중부지방에 폭설이 내렸다. 편집실의 폐인이 되어 가던 시간, 담배 한 개비를 물고 편집실 밖을 나섰더니 눈이 펑펑. 순백의 담요로 포근하게 덮여 가고 있는 심야 주차장의 재발견. 오랜만에 소담스럽게 쌓여가는 설경은 제법 탐스러웠지만, 이틀째 밤샘 편집에 시달리던 마음에 별다른 감흥을 돋아주진 못했다.

오히려 오만 가지 걱정. ‘길 막힐 텐데… 방송출연자 중 누군가 늦을지도 모를 테니, 조금씩 서둘러 달라고 연락을….’
그러다 발자국 하나 없는 눈 위에 누군가 꽤나 정성스럽게 써 놓은 글자를 발견했다.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으니, 몇 분전에 작성된 따끈따끈한 작품이었을 것. 새벽2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지만 편집실은 초 만원상태였고, 메뚜기 편집을 하던 누군가 어지간히 심심했겠군. 무슨 내용일까 궁금하기 보다는 ‘대체 누가 이런 귀여운 짓을 저질렀을까’하는 본능적 호기심. 그런데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걸작이다.

“집에 보내줘!!!(정말 느낌표 세 개가 찍혀 있었다)”

웃음이 피식 터져 나왔다. 아마도 이제 방송계에 갓 입문한 초년생의 절규가 분명하겠지. 대체 며칠이나 집에 못 들어갔길래, 저토록 애절한 구조 신호를 보낸 것일까? 그것도 몇 분내 사라질 것이 분명한 폭설 내리는 심야의 주차장 바닥에.

범인은 지난 주 첫 방송을 시작한 데일리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막내들이었다. 연예정보 프로그램은 예능계의 국가대표급 노동집약 프로그램이다. 신문으로 치면 사건 사고를 쫓아다니는 사회부 경찰 출입기자와 동급(실제로 취재의 3분의1 정도는 경찰서를 출입해야 한다). 그냥 우리말로는 예능의 막장.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해 편집실에 배달되는 주먹밥과 김밥만으로 사나흘을 버터야 하는 상황. 그조차 굶고 건너뛰어야 하기 일쑤. 그런 ‘초고도 근면성실 일체의 사생활 반납’ 프로그램을 데일리로 진행해야 하는 연출팀 막내들의 귀엽고도 애달픈 절규였던 셈이다.

OBS는 2007년 12월에 개국했다. 연차로의 3년 차에 들어섰지만, 개국한지는 아직 만 13개월의 새내기 방송. 지난 13개월 동안 ‘편집실의 유령’ 혹은 ‘편집실의 붙박이장’으로 살아야 했고, 앞으로도 살아야 할 청춘은 몇 명인지… 작년은 물론 올 초에도 어김없이 우리 사이에서만 유행한 농담이 있다.   

“올 해 출근해서 내년에 퇴근하겠습니다.” 반대로는…
“작년에 출근해서 올 해 퇴근했습니다.”

▲ 공태희 OBS 〈문화전쟁〉 PD

필자도 이번 주 방송을 위해 이틀은 밤을 새워야 한다. 이번 방송이 끝나고 나면 그 귀여운 아이들 하나도 남김없이 몰고 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 한 점에 시원하게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싶지만, 서로의 일정을 맞추기도, 다른 프로그램을 하는 연출팀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기는 더욱 어려운 일. 그저… 이 번 주도 이 방 저 방에서 편집실의 유령 혹은 붙박이장이 되어가며, 굶주림과 피곤을 앞에 두고 일대일 심층면접에 몰두하고 있을 그들을 위해 따끈한 호빵 한 봉지나마 건네주련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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