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사는 데에 도움이 되는가, 아무 쓸데없는가? ‘돈’이 되지 않으면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해버리는 지금 한국의 풍토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책조차 출간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고답적인 학제적인 인문학의 도도함을 깨버리고 일상의 문제로 접근하는 시도들은 언제나 반갑다. 특히 최근 〈호모 ~〉시리즈를 내고 있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시도들은 인문학의 ‘무용성’에 대한 적극적인 반박이고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호모 쿵푸스〉를 통해서 기존의 ‘공부’에 대한 담론-이성/지식-을 해체해 버리고, 언젠가 도올 김용옥이 이야기했듯이 공부는 ‘몸의 문제’라고 말했던 고미숙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를 잡았다. 가뜩이나 연애가 맘대로 되지 않아 항상 연애 무용담은 멋지게 하지만, 동시에 ‘그녀’ 앞에서는 손발이 오그라들던 나에게 고마녀(고미숙의 별명)의 대답은 무엇일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지금까지 숱한 연애와 관련된 책들을 읽어왔다. 송창민의 〈연애의 정석〉, 로버트 그린의 〈유혹의 기술〉,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심지어 〈포엠툰〉, 〈위대한 캐츠비〉까지……. 하지만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도 궁극적인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정말 많은 이들이 인터넷에서 연애와 사랑에 관련된 '연금술'들을 읽고, 또한 책들을 사서 읽지만, 그것들로 모두 사랑에 성공했다면, 왜 지금도 많은 이들은 실연의 상처에 허덕거리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손발이 오그라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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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의 문법대로 ‘공략하거나’ ‘공략당하거나’로 연애와 사랑을 일종의 심리게임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낭만적인 추억’으로서 사랑을 ‘승화’시켜버려서 “그래 우리 사귀자”라는 말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사랑의 지속’을 말할 줄 모르는 대책 없는 로맨티시즘, 혹은 사랑이라는 것과 본인을 격리시켜 ‘그 날’만 기다리는 태도. 그래서 ‘자기계발서’ 식의 ‘정답’을 제시해주는 연애 관련서가 허무할 것이고, ‘낭만적 사랑’을 말하는 하이틴 연애소설이 허무하고, “사랑 따윈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읽고 나서 마음이 황폐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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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쩌라는 거냐고? ‘정면 돌파’가 답이 되겠다. 현재에 대해 충실 하라는 것이다. 과거의 추억담에 잡혀서 현재를 회고하는 것에 소진하지 말고, 미래의 약속에 담보 잡혀 현재를 인질삼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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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요한 건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거다. 각 상황에 맞는 ‘처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사랑’이 찾아왔을 때 자신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
고미숙은 그렇기에 ‘연애’의 문제는 단순히 연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틀지워진 세상에서 ‘작업의 정석’을 강요하게 만드는 사회적 흐름에 대해 비판하고 새로운 ‘연애’를 창안하고, 사랑의 방법을 다시금 생각해 보고 또 몸으로 실천하자고 한다. 사실 우리는 연애를 ‘괜찮은 상대’를 만나는 일로만 생각하고, 그와 ‘사랑에 빠지는 것’까지만 생각하고, 그 이후의 ‘사랑을 유지하는 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지 않나? 조건에 의해 자신의 연애의 대상은 찾지만, 결국 그(녀)를 만났다 하더라도 그(녀)와의 관계의 유지라는 것에 대해 나름의 상을 정립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부딪히는 것 아닌가? 서로 스며들면서 변화하는 관계라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의 순간을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더 궁극적인 고미숙의 메시지는 그런 사랑이라는 것들이 단순하게 둘 만의 관계가 아니라, 주위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고,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을 바꾸고 자신의 몸의 행태를 바꿈으로서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에 기여하게 하는 것. 그렇기에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신의 준비를 고미숙은 ‘초식 쌓기’에 비유한다.
결국 중요한 건 자신의 반쪽을 찾는 ‘사랑의 대상’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가꿔가는 이야기이고 변화시키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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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연애’와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의 변화로 출발하여 주위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자는 이야기로 점점 나아간다. 에리히 프롬의 명저 〈사랑의 기술〉이 결국 세상이 '사랑'이라는 것을 못하게 어떻게 방해하는 지에 대한 사회 비평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김수현 드라마의 ‘로맨스의 파국’이 주는 카타르시스보다 노희경 드라마의 ‘관계’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내 이름은 김삼순〉의 메시지가 더 강렬하게 오래도록 지속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랑’에 대해서 환상적인 생각들을 걷어내고 지금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 있어서 ‘사랑’이 무엇인지의 의미를 밝혀준 것에 있었다. 땅에 발을 디딘 ‘지금 우리’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어느 세상에나 있을 법한 ‘모두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쉽게 정치 현상에 대해서 비판하고, 쉽게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생각들을 말하지만, 동시에 ‘작업의 정석’을 가지고, 혹은 반대로 ‘순결한 사랑의 환상’에 빠져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에서 회피해 왔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회피해왔던 ‘현재’의 누적들이 거대한 사회의 결들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까? 우리가 유보해왔던 현재의 소소한 행복들이 유예되다가 지금의 끔찍한 폭압적인 현실을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결국 일상의 문제, 그리고 ‘나’와 ‘우리’의 문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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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부터 시작되는 혁명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