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PD의 우리 시대의 노래 읽기] (1) 다시 노래 읽기를 시작하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의 흐트러진 풍경 통해 우리가 버린소중한 가치 되짚어 볼 참

|contsmark0|노래의 주인이 누구이건 간에 노래는 불러야 제 맛이다.
|contsmark1|산산이 흩어진 노래도 입을 모아 부르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contsmark2|
|contsmark3|
|contsmark4|노래 속에 꿈이 있다면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잃어버린 꿈을 다시 불러내는 이른바 꿈의 초혼제인 셈이다.
|contsmark5|
|contsmark6|
|contsmark7|오래 전부터 노래를 듣고 부르기 즐겨 했던 나는 어느 지점에선가부터 노래 읽기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contsmark8|고백하건대 내게 노래는 움직이는 시다.
|contsmark9|
|contsmark10|
|contsmark11|책읽기에 소홀했던 시간에 나는 노래를 읽어 왔다.
|contsmark12|엉뚱하게 들리겠지만 턱없이 부족한 독서량을 노래 읽기로 메꾸어 왔다고 변명하고 싶다.
|contsmark13|
|contsmark14|
|contsmark15|내 인생의 연보는 노래와 연결되어 있다.
|contsmark16|또렷이 기억난다.
|contsmark17|
|contsmark18|
|contsmark19|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나 그때 막 가수로 데뷔한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 ‘돌지 않는 풍차’를 천연덕스레 따라 부르던 게 나였다.
|contsmark20|
|contsmark21|
|contsmark22|6학년 때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으며 정훈희의 ‘안개’를 처음 들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형언 못할 감동(?)으로 몸을 떨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contsmark23|
|contsmark24|
|contsmark25|“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부분에선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contsmark26|
|contsmark27|
|contsmark28|펄 시스터즈가 ‘커피 한잔’을 부르는 고혹적 자태를 만화가게에서 텔레비전으로 훔쳐보며 가슴 설랬던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contsmark29|
|contsmark30|
|contsmark31|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와 ‘거짓말이야’를 친구들과 합창하며 중학시절을 마무리했다.
|contsmark32|
|contsmark33|
|contsmark34|고등학교 내내 나를 묶었던 노래들은 김민기표 노래들이었다.
|contsmark35|
|contsmark36|
|contsmark37|지금으로 말하자면 그때 그는 내게 서태지였다.
|contsmark38|‘작은 연못’ ‘인형’ ‘서울로 가는 길’과 함께 나는 걸었고 헤맸고 또 자랐다.
|contsmark39|
|contsmark40|
|contsmark41|고등학교를 마칠 때 김정호의 노래를 들으며 ‘노래하는 법(창법)은 그가 살아가는 법’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contsmark42|
|contsmark43|
|contsmark44|대학교 3학년 때 한쪽에서 친구들이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부를 때 다른 한 귀퉁이에서 그 이름만으로도 분위기가 탁해지는 막걸리를 마시며 우리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흐느끼듯 ‘외쳤다’. 대학 졸업반 즈음에 산울림을 들은 후부터는 죽 그들의 노래들을 수집하다시피 했다.
|contsmark45|
|contsmark46|
|contsmark47|그 형제들은 ‘황무지’ 같은 내 마음에 동심이 새겨진 주단을 깔아 주었다. 들국화의 노래는 내 또래인 (그러나 전혀 다르게 살아온) 전인권의 거친 숨결만큼이나 격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contsmark48|
|contsmark49|
|contsmark50|‘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음’을 일깨워 준 시인과 촌장, 혜화동이건 시청앞이건 살아오면서 잃게 된 것들의 회복을 간절히 꿈꾸던 동물원, 돈이나 권력보다는 빼앗긴 노래를 찾아야 함을 환기시켜 준 노찾사, 돌아가신 아버지를 되살려 준 강산에의 ‘라구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다시 마주친 한대수의 ‘하룻밤‘ 그리고 김광석이 먼 나라에서 부친 ‘이등병의 편지’.
|contsmark51|그리고 고단한 삶의 고비마다 “그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를 돌아보게 한 서태지…
|contsmark52|
|contsmark53|
|contsmark54|본격적으로 노래 읽기를 시작한 건 1987년 9월 를 통해서였다. “프로그램이나 제대로 해”라는 빈정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13년간 끈질기게 계속해온 내 글쓰기의 출발점이었다.
|contsmark55|
|contsmark56|
|contsmark57|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지만 감히 세상에 글을 발표한다는 건 내 자신과 세상에 대한 실례라고 느끼며 살아온 터였다. 그러다가 딱 한번 노래평을 써 본다고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와 버렸으니 참 결례도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
|contsmark58|
|contsmark59|
|contsmark60|mbc가이드를 통해 소박하게 데뷔(?)한 나는 한겨레신문이 ‘노래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자고 제의해 왔을 때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contsmark61|
|contsmark62|
|contsmark63|내가 신문에 글을 쓰다니… 그것도 매주 쓰다니…그러나 멋모르고 까불던 나는 기어이 예고된 화살을 받고 어린(?) 마음에 상처받는다.
|contsmark64|
|contsmark65|
|contsmark66|신나게 노래 읽기를 하던 내가 어느날 우연히 한겨레 노보를 읽게 된 것이다.
|contsmark67|바로 몇 주 전 한영애의 "누구 없소"에 대해 ‘정의가 부재한 시대에 의인을 부르는 노래’라고 일갈해 버린 나를 질책하는 내용이었다.
|contsmark68|
|contsmark69|
|contsmark70|일개 사랑 노래에 대해 “이 시대의 어둠 속에선 지금 어떤 음모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우리가 그 범의를 차단하지 못한다면 우린 결국 한패가 되거나 훗날 궁색한 자기 변명으로 더욱 초라해질 뿐이리라”라고 ‘견강부회’한 게 그들이 지적한 내 ‘오버’의 실체였다.
|contsmark71|그 후 얼마 안 되어 나는 연재를 중단했다.
|contsmark72|
|contsmark73|
|contsmark74|모든 노래는 사랑 노래이다.
|contsmark75|노래가 다양한 것은 사랑의 방향과 풍경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contsmark76|
|contsmark77|
|contsmark78|지금 다시 그 글을 읽어 보니 솔직히 “그때 내가 참 순수했구나”하는 안도감이 든다.
|contsmark79|‘누구 없소‘의 한 귀퉁이에 이런 부분이 눈에 밟힌다.
|contsmark80|“세상에 대한 사랑이 거짓 사랑이 아니었음은 그 사랑이 고통과 대면했을 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contsmark81|
|contsmark82|
|contsmark83|노래가 꿈이라면 노래 읽기는 해몽에 해당한다.
|contsmark84|다시 시작하는 ‘노래 읽기’에서도 나의 관성적 오버를 억제하긴 쉽지 않을 성싶다.
|contsmark85|
|contsmark86|
|contsmark87|다소 억지가 깃들더라도 “이런 해몽도 있을 수 있구나” 정도로 넘어가길 희망한다.
|contsmark88|해몽이 꿈의 본색과 본질을 훼손할 순 없다.
|contsmark89|다만 이 연재물을 통해 나는 우리가 살아온, 그리고 살고 있는 세상의 흐트러진 풍경을 통해 우리가 내다버린 소중한 가치를 되짚어 볼 참이다.
|contsmark90|
|contsmark91|
|contsmark92|21세기에도 실례는 계속된다.
|contsmark93||contsmark94|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